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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리서치 트라이앵글'을 가다]농장지대에 꽃피는 '연구벨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선거판이 어지러울수록 눈을 돌려 멀리 넓게 우리를 바깥 세상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정국 혼란과 경제 난국 속의 모든 문제들은 제15대 대선 이후에도 죄다 해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거후를 미리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정권을 잡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다.

대선에 휘말린 우리와는 일견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州) 의 리서치 트라이앵글 지역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런 의미다.

지방자치.네트워킹.산업구조 조정.세계화.미래 구상.삶의 질 등 우리가 부등켜안고 있는 거의 모든 과제들을 이 지역 사람들은 40여년에 걸쳐 세대를 바꿔가며 벽돌 쌓듯 하나하나 추진해오고 있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을 배출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UNC) 은 1793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주립대학이다.

설립후 거의 1백60년이 지난 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UNC가 있는 채플 힐 주변은 담배.목화가 넘쳐나는 농장 지대였다.

그러나 지금 UNC는 생명공학등 첨단산업 연구단지가 들어서 있는 리서치 트라이앵글을 구성하는 3개 대학중 하나다.

리서치 트라이앵글은 실리콘 밸리만큼 다이내믹하지 않다.

또 동부의 보스턴지역처럼 오래되지도 않았다.

떠오르는 신흥 도시나 거대한 경제력을 가진 대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곳은 전통산업인 농업과 첨단산업.연구단지가 좋은 기후속에 잘 어우러져 '미국서 가장 살기 좋은 곳중 하나' 라는 부러움을 받아가며 미래를 향해 '거북이' 처럼 하루 하루를 바꿔가고 있는 곳이다.

실리콘 밸리나 보스턴이 스탠퍼드.MIT와 같은 탁월한 대학을 핵으로 첨단 산업이 일어난 '자생 (自生) 지대' 인 반면, 리서치 트라이앵글은 과거의 농장 지대에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인위적으로 일구고 있는 '계획 단지' 다.

"다음 세대에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지금 씨를 뿌리고 있다"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 (RTP) 안에 있는 노스 캐롤라이나 생명공학센터의 배리 티어터 대외담당 국장의 말은 비단 투자회임기간이 유독 긴 생명공학 분야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원래 담배나 목화를 심던 미국의 대표적 '농업주' 였다.

지금도 농업은 여전히 노스 캐롤라이나의 주요 산업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전쟁에서 돌아온 세대들이 주 (州) 정부나 각 카운티의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노스 캐롤라이나는 지난 40여년간 미래의 수확을 위한 '투자의 씨앗' 을 심어왔고 지금도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RTP는 지난 59년 설립됐지만 최초의 구상은 52년부터 시작됐다.

주정부가 RTP내에 생명공학센터를 설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이었다.

UNC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대학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NCSU) 은 올해로 개교 1백주년을 맞아 현재 '1백년 캠퍼스 프로젝트' 를 진행시키고 있다.

약 4백만㎡의 부지 위에 연구단지.주거단지.편의시설.골프장.모노레일 등을 모두 갖추겠다는 장기 계획이다.

대학 캠퍼스의 개념이 '연구하며 사는 마을' 로 완전히 바뀌고 있는 셈이다.

RTP가 지역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RTP 주변의 13개 카운티들은 몇년 전 부터 광역 커뮤니티인 '파트너쉽' (RTRP) 을 구성, '지역 마케팅' 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유명한 골프장 파인헐스트가 있는 무어 카운티등이 포함된 RTRP의 목적은 농업.관광등 전통산업에다 첨단.무공해 산업을 섞겠다는 것이다.

주 정부는 이같은 '지역주의' 가 주 전체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요소가 많다고 판단, 나머지 카운티들에 대해서도 '지역주의' 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노스 캐롤라이나의 이같은 '씨앗 뿌리기' 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정부.기업.대학의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의 면에서도 실리콘 밸리나 보스턴이 자생적이라면 이 곳은 인위적이고 그만큼 속도가 더디다.

그래서 한국의 입장에선 참고할 점이 더 많다. "트라이앵글 구상은 이곳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두뇌들을 이 곳에 유치해 MIT처럼 지역 개발의 엔진으로 삼자는 데서 출발했다."

비영리기구 RTRP의 최고경영자격인 챨스 헤이스씨는 지금과 같은 네트워킹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지난 59년 RTP가 설립된 이후 IBM이 입주한 65년 이전까지 파크 개발은 영 부진해, 한 때 직원 봉급조차 주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미 전역을 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녔던 각고의 마케팅 노력이 있었고 IBM과 함께 국립환경보건과학연구소 (NIEHS)가 입주하면서 한번 시동이 걸리자 그 이후의 개발은 비교적 순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환경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제조업체 유치를 마다하고 리서치 파크로 남아있기를 고집, 40여년이 지난 지금엔 부가가치가 높으면서도 철저하게 환경친화적인 파크를 일궈냈다.

NCSU의 마이크 월든 교수 (경제학) 는 94년 기준 RTRP 지역 전체의 총생산 5백80억달러 중 현지에서 얹힌 부가가치는 3백50억달러였다고 설명한다.

그중 담배산업에서 약 6억달러, 의약분야에서 15억달러의 부가가치가 각각 창출된 것을 보면 이제 더 이상 담배는 이 지역의 주된 산업이 아니다.

덕분에 이 지역의 1인당 소득은 94년 2만1천7백94달러로 노스 캐롤라이나 전체 평균 1만9천5백67달러보다 높아졌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약 12만6천평방㎞로 남한 (약 10만평방㎞) 보다 넓은 반면 인구는 8백만명이 채 안돼 서울 인구보다 더 적다.

부러운 자연 조건이지만 더 부러운 것은 50년대 중반부터 당시 주정부.대학.기업.은행의 리더들이 뜻을 합쳐 주의 장래를 구상하고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59년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였던 루더 호지스가 RTP 설립을 공표했을 때 몇몇 기업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시드 머니' 는 겨우 1백50만달러였다.

52년에 트라이앵글 구상을 처음 제창한 당시 UNC 사회과학연구소장 하워드 오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생전 트라이앵글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에 이름을 날리려고 하지 않았던 이들은 지금도 트라이앵글의 기초를 든든히 받치고 있다.

랠리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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