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세계화'와 '국제화'의 혼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나라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개념의 명확화를 기하지 못함으로써 착각과 혼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 하나의 예로 이른바 '세계화 (世界化)' 라는 말과 '국제화 (國際化)' 라는 말의 혼용과 착각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세계화' 라는 말은 영어의 '글로벌라이제이션 (globalization)' 을 뜻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에 비해 '국제화' 라는 말은 '인터내셔널리제이션 (internationalization)' 을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이 두가지 용어는 각각 태어난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개념을 명확히 안다면 착각하거나 혼란을 겪을 이유가 조금도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수많은 신문독자 가운데 그런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다고까지 지적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아울러 구호 (口號) 를 좋아하는 (?

) 정부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세계화' 라는 말은 '글로벌화' 또는 '지구화' 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영어의 '글로벌' 이라는 말이 뜻하는 그대로 '지구적인 규모' 를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 또는 '글로벌화' 라는 말은 오늘날 금융이나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적인 규모의 시장 (市場) 의 유기적 (有機的) 인 결합과 동질화 (同質化) 의 상황을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세계화' 라는 말은 이런 뜻에서 경제적인 함의 (含意) 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국제화' 라는 말은 정치적인 뜻이 함축돼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인터내셔널리제이션' 이라고 할 때의 '인터내셔널' 이라는 말이나 '인터내셔널리즘' 의 번역은 정치적 배경을 모르고는 혼동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물론 '인터내셔널' 은 '국제적' 또는 '국제간 (國際間)' 이라는 의미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단정해버리면 그만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이라는 말이 범용화된 역사적 배경을 보면 그것이 국제노동운동, 나아가서는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조직과 관련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내셔널리즘' 이라고 할 때는 각각 국가의 존재와 민족문화의 차이를 긍정하면서 국제간의 공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된다.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민족과 국가의 차이를 무시하고 세계 통일을 실현코자 하는 이른바 '코스모폴리터니즘' 의 반대되는 개념인 것이다.

'세계화' '국제화' 란 말과 함께 흔히 쓰이는 개념으로는 이른바 '보더리스 (borderless)' , 곧 국경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규모의 금융.자본의 거래가 정치적인 국경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란 비단 경제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통신분야, 특히 매스컴의 세계에서도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뉴스의 커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젠 세계와의 동시성 (同時性) 을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정확히 독자에게 전달하느냐가 신문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우리 언론의 해외 특파원이나 주재원의 존재양식에 커다란 전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긴 국내뉴스의 취재와 비교해 볼 때 해외뉴스의 취재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취재인원의 측면에서 볼 때 소수 인력으로 외국 상황을 전반적으로 커버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외국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된 것을 그대로 카피하는 방식이 지양되지 않고는 어떤 어려움인들 그것을 어려움이라고 평가받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해외뉴스의 커버는 그것이 특파원이 직접 취재한 것인가의 여부에 따라 기사내용에서 엄청난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만약 현지신문에 보도된 것을 인용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을 어떻게 직접취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런 뉴스의 비교 내지 판단의 기준조차 혼미스러운 구석이 엿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점을 특히 느낀 것은 최근에 있었던 북한선박 '와산' 호 (2천4백25t급) 의 일본 해안 좌초기사 때문이었다.

'와산' 호가 태풍 때문에 선원 24명을 태운채 일본 가고시마 (鹿兒島) 남쪽 오사키 (大崎) 해변에 좌초한 것은 지난 9월17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앙일보를 비롯한 우리나라 유수한 신문에 보도된 것은 그보다 한달이 지난 뒤인 10월20일이었다.

이렇게 뒤늦게 보도한 것은 물론 그 사실을 현지특파원들이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좌초 한달이 돼도 처리되지 않고 있는 북한선박의 속사정이란 취지로 일부 일본신문에 보도되자 우리나라 신문은 대서특필로 호들갑을 떤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뉴스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호들갑을 떨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큰 뉴스라면 일본신문보다 더 상보 (詳報)가 있어야 할 터이고 아울러 후속보도로 이어져야 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 현재까지도 '와산' 호가 어떻게 됐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규행 본사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