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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88세를 일기로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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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29일 오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양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노환에 따른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치료를 받아 왔다.

양 전 회장의 친동생인 양규모 KPX 회장은 이날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형님이 국제그룹 재건에 미련을 버린 지 오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원한이 없진 않겠지만 병상에 드러누우면서 체념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때 재계 7위의 대기업 집단을 이끌던 양 전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시절인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그룹을 되찾기 위해 애썼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제그룹의 공중분해가 결정된 것은 85년 2월 21일. 주거래 은행이던 제일은행의 이필선 행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제그룹 정상화 대책’을 발표했다. 국제그룹의 계열사들을 한일합섬·극동건설·동국제강 등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굴지의 국제그룹이 한순간에 분해되는 순간이었다.

양 전 회장은 47년 부친 양태진씨가 운영하던 부산의 정미소 한편에 고무신 공장을 차렸다. 49년 국제화학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성장 신화를 썼다. ‘왕자표 고무신’ 등 신발이 주력이던 이 회사는 한국전쟁 중에 군수품 납품으로 급성장했다. 63년에 세운 신발·비닐제품 생산업체 진양화학은 70년대 신발 수출 붐을 타고 성장 가도를 이어갔다. 국제상사는 미주 대륙에 최초로 국산 신발을 수출한 회사다. 양 전 회장은 이후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와 국제상선·신동제지·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따라 창업하고, 동서증권·동우산업·조광무역·국제토건·국제종합엔지니어링·원풍산업 등을 인수해 규모를 키웠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국제그룹이 정권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위인 권영수 LG디스플레이 대표는 "사업을 했던 사람으로 안 보일 정도로 내성적이고, 정치 관행을 잘 모르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기업 재무 사정도 좋지 않았다. 이 같은 안팎의 사정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그룹은 해체 직전 부채비율이 964%에 달했고, 제2금융권인 단자회사 등에만 5500억원 상당의 빚이 있었다. 기업들이 많이 사용한 일종의 전환사채인 ‘완매채(完賣債)’도 문제였다. 증권회사 등에서 완매체를 통해 적지 않은 돈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 차원에서 완매채에 대한 과세 조치를 취하면서 급격히 자금난을 겪었다.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고층빌딩이었던 용산의 국제그룹 사옥을 짓는 과정에서 무리를 했다는 평가도 있다.

양 전 회장의 정권과의 불화설 등 각종 의혹은 ▶그룹 해체가 공개되지 않고 밀실에서 이뤄진 점 ▶해체 이후 매각 과정의 불투명성 등에 집중된다. 실제 이런 의혹은 정권이 바뀐 뒤 헌법재판소 등에 의해 일부 입증이 된다. 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의 해체 결정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 전 회장이 뿔뿔이 흩어진 계열사를 되찾아 그룹을 재건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94년에는 주요 계열사를 인수한 한일합섬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신한종금·동서증권이 문을 닫고, 국제상사와 국제그룹 빌딩 등을 가져간 한일그룹 역시 해체됐다. 이후 양 회장은 뚜렷한 대외 활동 없이 칩거에 들어갔다.

양 전 회장의 형제들은 여전히 경영 활동을 하고 있다. 화인케미컬 등의 지주회사인 KPX 양규모 회장, 대한전선 양귀애 명예회장이 그의 친동생이다.

유족으로는 2남11녀가 있다. 무역회사 ICC 대표인 장남 양희원씨와 사위 권영수 대표 , 이현엽 충남대 교수, 왕정홍 감사원 행정지원실장 등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20호, 발인은 4월 1일 오전 8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다. 02-3010-2631.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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