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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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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때는 1988년, ‘벽돌 깨기’와 ‘수퍼 마리오’가 지배하던 동네 오락실에 낯선 녀석이 나타났다. 위에서 떨어지는 일곱 가지 모양의 블록을 조정해 빈칸을 메우는 게임. 테트리스였다. 한 판이 끝날 때마다 코사크 복장을 한 병정이 튀어나와 슬라브 민요 ‘칼린카’에 맞춰 익살스러운 춤을 췄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 이 게임은 러시아산이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알렉세이 파지노프(54)가 85년 만들었다. 수학을 전공한 그는 퍼즐 매니어였다. 어느 날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둔 블록형 퍼즐 ‘펜토미노스’를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 볼 생각을 했다. 펜토미노스는 정사각형 5개로 구성된 각기 다른 모양의 블록 12개를 상자에 맞춰 넣는 게임이다. 그는 지나친 복잡함을 피하려고 블록 하나를 구성하는 정사각형 수를 4개로 줄였다. 각기 다른 7개의 블록이 만들어졌다. 게임 이름은 ‘4’를 뜻하는 그리스어 ‘테트라’에서 따왔다.

열흘간 자투리 시간에 심심풀이로 만든 이 게임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2년이 채 못 돼 동구권은 물론 유럽·미국·일본까지 퍼졌다. 저작권은 소련 정부가 가졌다. 개발자에게 돌아간 건 IBM PC 한 대가 전부. 닌텐도 게임보이용으로만 7000만 장 넘게 팔린 걸 생각하면 파지노프가 놓친 저작권료는 수백억원, 그 이상일 것이다.

놀라운 건 이 게임의 전성기가 아직 현재진행형인 점이다. 시계·계산기·PDA·휴대전화, 어떤 기기건 테트리스는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든다. 온라인 게임으로도 진화해 우리나라에서만 50만 명의 동시 접속자 수를 유지하고 있다.

아류작도 수백 종에 이른다. 테트리스는 단순하다. 누구나 부담 없이 덤빌 수 있다. 폭력성·선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무척 재미있다. 게임평론가 히라바야시 히사카즈는 “규칙성과 의외성의 절묘한 균형 덕분”이라고 말했다. 게임은 놀이며 재미야말로 그 본질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란 평이다.

‘테트리스의 아버지’ 파지노프가 31일 서울에 온다. 91년 미국에 정착한 그는 96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저작권을 되찾았다. 게임디자이너로 여전히 활약 중이다. 그는 BBC 등과의 인터뷰에서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나 스스로 즐기기 위해 게임을 만든다”고 말해 왔다. 그런 그가 현금이 오가는 건 기본이고, 재미보다 경쟁에 미쳐 자동 득점 프로그램까지 돌리는 우리 게임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게임 안에서의 싸움만으론 성이 안 차 직접 만나 칼부림까지 하는 요지경 속 세상 말이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