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농업에 필요한 건 상상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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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고위 공무원이 대학을 찾아가 특강을 했다. 강연 주제는 뜻밖에도 ‘Creativeness(창조성)’. 어떻게 공무원이 창조성을 주제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을까. ‘공무원은 규정 빼면 시체’라고 세간의 입방아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하지만 강연자가 민승규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민 차관은 민간에 있을 때부터 추진력 있는 ‘아이디어 맨’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얼마 전 문을 연 떡볶이연구소도 그가 청와대 농수산식품비서관으로 일하던 시절 물밑에서 추진했던 작품이다. 이름부터 재미있는 이 연구소는 떡볶이를 한식세계화의 첨병으로 키우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5~10년 후 청소년들이 장래 희망란에 자신있게 ‘농부’라고 쓸 수 있는 농업ㆍ농촌을 만들고 싶다”는 민 차관의 서울대 특강을 중앙SUNDAY가 밀착 취재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


“제목이 좀 생뚱맞죠?”
25일 오후 4시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의 대형 강의실. 250여 명의 학생 앞에서 민승규(48·사진)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이 마이크를 잡고 특강을 시작했다. 이날 강연 주제는 ‘Creativeness(창조성)-창조적인 플레이어가 되자’였다. 얼핏 ‘창조성’과 ‘공무원’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둥근 네모’나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농식품부 차관의 강연 첫마디는 이런 점을 감안한 발언 같았다. 사실 그는 올 초 농식품부 차관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아이디어 뱅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달 11일 문을 연 떡볶이연구소도 그가 청와대 농수산식품비서관으로 일하던 시절 물밑에서 추진했던 작품이다. 그는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할 때부터 ‘돈 버는 농업’과 ‘농업 최고경영자(CEO) 10만 명 양병설’을 주창하며 농업의 산업화를 강조했다. 수출지향적 농업, 고부가가치 첨단 농업, 자본집약적 농업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창조적 플레이어는 남들이 과거에 했던 것을 흉내 내지 않습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뭔가를 추구해야 합니다.”

민 차관은 상상력의 힘을 중시했다. 남다른 상상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재미·스케일·감동, 때로는 ‘미친 짓’도 필요해요. 창조적 플레이어의 요체는 상대방과 경쟁자·고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겁니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우선 정보의 양이 중요하다. 그는 연구소 시절 매일 신문 수십 가지를 읽고 매주 잡지 70권을 훑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며, 늘 현장에 답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약자인 한국 농업이 강자인 선진 농업을 이기려면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그는 “앞차를 추월하려면 차로를 바꿔라”고 했다. 관성과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민 차관 강연에는 신조어가 넘쳤다. 간결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조립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3요소는 ‘감상실’이라고 했다. 감(感·감수성)+상(想·상상력)+실(實·실천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가치 창출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는 ‘연개소문’이 제격이라고 했다. 연(連·네트워크), 개(開·열린 사고), 소(小·작지만 강한 농업), 문(紋·자신만의 무늬와 색깔을 만들어라)이란 의미다. 특히 네트워크와 관련, “학연·지연·혈연을 떠나 언제든지 전화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라”고 강조했다.

강의의 후반부는 그가 산파 역할을 맡았던 한국벤처농업대학 얘기였다. 정규 학교는 아니지만 스타 농민을 이미 숱하게 배출해 유명해진 곳이다. 민 차관뿐만 아니라 현 정부의 농정 주요 자리에 이 대학과 관련된 인사가 많다. 민 차관의 후임인 남양호 청와대 농수산식품비서관도 여기서 강연을 했다. 장태평 농식품부 장관은 재정경제부 국장과 농림부 국장 시절, 이 학교를 찾아 여러 차례 강의하고 토론하며 교류했다.

민 차관은 2001년 당시 충남 금산군의 한 폐교에 벤처농업대학의 둥지를 틀었다. 수업은 1년 동안 매 주말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토요일 오후 3시부터 11시30분까지,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강행군이 이어진다.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정오까지 꼬박 밤을 새우는 ‘21시간 연속 철야 워크숍’도 가끔 한다. 철야 워크숍을 마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농민도 있단다. 지금까지 7회 졸업생이 배출됐다. 올봄 9기 수강생을 모집할 때는 정원 150명에 6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였다. 학사관리가 엄하기로 ‘악명’이 높아 졸업하기가 쉽지 않다. 1기 입학생 87명 중 27명만이 1년 만에 졸업했다.

민 차관은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김구 선생의 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끝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는 “가장 강한 농업을 만드는 것은 힘들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농업, 가장 재미있는 농업은 만들 수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농업 개혁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농업 개혁은 스스로 자신에게 메스를 가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게 가장 어려워요. 조직의 저항도 있을 겁니다. 어렵고 힘들겠지만 아름다운 농업을 만들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은 자만이 미래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남이 깨면 계란 프라이가 되지만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됩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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