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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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이예린씨… 방송국 피디야. "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같아 나는 이예린이 했어야 마땅할 말을 내가 대신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하영의 표정을 보고 나서 나는 일이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꼬여가고 있다는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예린이 방송국 피디인데 어쩌라는 말이냐, 하는 표정으로 하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터무니 없는 방식으로 내가 이선생님을 신뢰하고 있었나 보군요. " 창백해진 낯빛으로 하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를 오해하는 모양인데… 이건 감정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구. 하영이와 내가 지금 주고받아야 할 말은 이런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와. " 말을 하면서도 정말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가 지껄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이예린을 포옹했던 감각적 기억, 그것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나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영과 갑작스럽게 조우하게 된 나의 양심에 그것은 이미 지울 수 없는 문채 (文彩) 로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몇번이나 망설이다 찾아왔는데… 정말 후회스럽네요. " 자신의 결정을 아프게 되새김질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영은 말했다.

그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이선생님, 저 그만 가 볼께요. 해야 할 얘기가 남았지만, 제가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께요. " 의자에 걸어두었던 투피스 상의를 입고 다시 문앞으로 걸어나온 이예린이 밝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영의 얼굴과 이예린의 표정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어서 얼핏 컬트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하영에게도 이예린은 가볍게 한마디했다.

그러는 이예린의 행동이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다분히 작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예린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하영은 여전히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몽롱한 표정으로 문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예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직후, 이윽고 그녀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코미디람. 눈물을 흘리는 하영을 보자 울컥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재수가 없으면 접시물에도 익사할 수 있다더니, 시간과 시간의 공교로운 맞물림 때문에 내 자신이 정말 웃기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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