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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제인캠피온 '여인의 초상' …심리소설 영상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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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키스할 때 가장 멋진 순간은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걸 느낄 때야. 곧 입술이 닿으리란 기대감…" 제인 캠피언 감독이 '피아노' 이후 4년만에 내놓은 신작 '여인의 초상' (11월1일 개봉) 은 젊은 여성들의 성적인 환상을 담은 흑백의 몽타주화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내용과 동떨어져 보이는 이 장면은 그러나 영국작가 헨리 제임스의 심리소설을 영화화한 캠피언의 새로운 해석과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헨리 제임스가 1881년 발표한 원작은 여주인공 이사벨 아처 (니콜 키드먼) 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세심하고 흥미롭게 쫓아간 심리소설. 글로 상세하게 묘사한 심리드라마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영화화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과제를 캠피언 감독은 여성들만의 독특한 감정을 표현할 수있는 여성감독으로서의 유리함과 특유의 색채와 구성,에로틱한 분위기의 화면으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 이사벨 아처는 아름답고 부유한 젊은 미국여성. 그녀는 열정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내 책상 위의 천사' 나 '피아노' 등 캠피언 감독의 이전 작품 주인공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세상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한 순진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파국으로 치달음으로써 '피아노' 의 아이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는 원작소설의 내용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점이 있겠지만 캠피언은 이사벨의 성적인 환상과 상상의 모험을 몽상적인 화면에 담는 수법으로 고전극에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 넣었다.

이사벨이 3명의 연인으로부터 동시에 사랑의 공세를 받는 환상과 초현실적인 느낌의 몽환적인 장면들의 삽입이 캠피언적인 색채를 더해준다.

부유한 환경에서 커 세상의 악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이사벨은 너무나 순진해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자체도 사랑앞에 쉽게 허물어지는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뿌리친 그녀는 아무 것도 지닌게 없는 오스먼드 (존 말코비치) 와 어리석은 결혼을 함으로써 불행의 늪에 빠진다.

신분상승 욕구가 강한데다 여성혐오주의자 (그는 신분상승을 위해 아내와 딸, 누이와 정부를 철저히 이용한다) 인 오스먼드와 그의 옛애인 멀은 이사벨을 이용하고 배신한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리석은 여인의 불행을 담은 멜로드라마로 빠진 것은 원작 때문이겠지만 영화는 원작의 흥미로운 심리관찰을 담아내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스타일의 독특함은 이 영화가 확실한 '제인 캠피언 브랜드' 임을 보여준다.

제인 캠피언에게서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또 한 사람의 벙어리 아이다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이사벨에게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니콜 키드먼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악마의 화신역을 맡은 존 말코비치의 연기는 너무 연극적이어서 답답하다.

이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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