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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조건 없이 받은 사랑 4배로 갚으려고 … ” 온 가족 장기기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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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신장 기증 수술을 받은 김화순(53·왼쪽)씨는 “수술이 두렵기보다는 첫사랑 때처럼 설렌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남편 권오선(55)씨.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제공]

충남 논산에 사는 김화순(53·여)씨 가족은 장기기증 서약을 한 ‘나눔 가족’이다. 2007년 가을 김씨는 남편 권오선(55)씨, 둘째 아들 기남(21)씨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찾았다. 신장기증 서약을 위해서다. 큰아들 기복(27)씨는 백혈병 환자를 위한 조혈모세포(골수) 기증 등록을 했다. 네 사람 모두 사후 장기기증이 아닌 순수 장기기증 서약자다. 생전에 장기기증을 약속한 것이다.

평범한 한 가족이 생명 나눔을 실천하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5년 전 남편 권씨의 여동생이 갑작스레 “신장 기능이 저하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급성 신부전이었다. 가족들 모두 “내 신장을 이식해 달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이식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맞는 이가 없었다. 가족들은 안타까움에 발만 굴렀다. 혈액 투석을 받으며 1년 넘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권씨의 여동생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낯모르는 순수 기증자로부터 이식을 받게 된 것이다. 건강한 신장을 이식받은 권씨의 여동생은 새 삶을 찾았다. 수심이 가득했던 가족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김씨는 “아파하는 시누이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무력감을 잊을 수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언젠가 우리도 다른 이에게 이 은혜를 베풀자고 약속했어요.”

이때의 약속이 5년 만에 지켜지게 됐다. 김씨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수술대에 올랐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에게 한쪽 신장을 내주기 위해서다. 14년간 결근 한 번 하지 않고 다닌 자동차 시트 제조공장에 한 달간 휴가를 냈다. 논산훈련소에서 원사로 근무 중인 남편 권씨와 지방에서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 전경으로 복무 중인 둘째 아들 모두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둘째 아들 기남씨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며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수술받겠다”고 말했다. 수술 직전 김씨는 “드디어 약속을 지키게 돼 마음이 편안하다. 두렵기보다는 첫사랑인 남편을 만나 연애할 때처럼 설렌다”며 웃음지었다.

이날 김씨의 오른쪽 신장은 울산에 사는 천모(50)씨에게 전해졌다. 천씨는 8년째 혈액 투석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만성 신부전 환자다.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받는 천씨는 “한 번에 4시간씩 걸리는 투석 치료를 받고 나면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 생업도 내려놓은 절망적 상황”이라며 “생면부지의 남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분은 천사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수술 다음 날 만난 김씨는 “벌써 조금씩 산책하러 다닐 만큼 멀쩡하다”며 “기증할 수 있을 만큼의 건강을 허락받았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26일 퇴원한다. 이식 수술을 집도한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김성주 교수는 “두 사람 모두 수술 경과가 좋다”며 “이식자인 천씨는 10여 일 뒤 퇴원하면 더 이상 투석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박진탁 본부장은 “김씨 가족의 사연이 특별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장기기증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사회에 심어 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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