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역 '거리의 젝키' 현진이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수유역 앞의 아이들은 최근 들어선 교보문고 분점 앞 속칭 ‘교보공원’에서 시간을 죽인다. 가로수와 벤치가 있어 돈 없고 갈 곳 없는 애들이 끼리끼리 얘기를 나누기 좋아서다.

아이들이 여기를 자주 찾는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좀 ‘춘다’는 애들이 즉석 공연을 펼치기 때문이다. 대학로처럼 여러 팀이 모여 춤추는 건 아니지만 이틀에 한번 꼴은 무명댄서들을 만날 수 있다.

현진이네도 이곳에서 소문난 춤꾼들. 한데 어울리는 애들은 열댓명 정도지만 진짜 ‘선수’들은 남자아이 여섯명. 열아홉 현진이와 열여덟살 동갑내기들인 해진·성국·창훈·종관·정록이다. 모두 동네서 춤추다 만난 사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공연이 시작된다. 팔·다리·허리가 완전히 따로 논다. ‘토마스(손을 땅에 짚고 양 다리를 V자 모양으로 만들어 도는 동작)’나 ‘세미(한손을 땅에 짚고 물구나무선 채로 양다리를 벌리는 동작)’같은 기술을 보이면 모여있던 아이들이 ‘와∼’함성을 지른다. 지나가던 어른들도 잠시 멈춘다.

가수가 되는 게 이들의 꿈이다. 굳이 이곳에서 춤을 추는 것은 연습실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란다. 요즘엔 큰 일을 앞두고 있다. 곧 H.O.T를 길러낸 SM기획에서 오디션을 치를 예정이다. 조그마한 카세트 플레이어로 젝스키스의 ‘폼생폼사’를 틀어놓고 동작을 맞춰본다. 그러고 보니 이들도 ‘젝키’처럼 여섯명. 얼핏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음악도 자신 있다. “무조건 힙합”이라고 성국이가 자신들의 취향을 밝힌다. 다른 애들이 입으로 ‘풉파풉파∼’하는 가운데 해진이가 즉석에서 랩을 한다. “나는저기변두리도시끝에초라한마을가난한집에서태어나…”허니라는 댄스그룹의 ‘엑스라는 아이’란 곡이다. 자기들 처지를 그린 것 같아 와닿는단다.

팔과 다리가 그리는 곡선이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을 긁어놓는다.

진지한 표정으로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

온통 딱딱하고 칙칙한 것뿐인 도시공간에서 어떻게 저런 '예술' 이 삐져나왔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등에 누군가의 한마디가 뾰족하게 꽂힌다.

“아저씨, 이거 신문에 나면 여기서 춤 못추게 되는 거 아니죠?”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