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내레이터모델 PD 이지선씨…“관객 시선을 제품쪽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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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지선 (27) 씨는 무관심과 관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한다.

어느 한쪽으로 휘청거리고 나면 중심을 잃고 무너져버리는 곡예. 그녀는 흔히 '전시장의 꽃' 이라 불리는 내레이터 모델의 연기를 지도하고, 그들의 조화된 몸짓을 통해 전시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PD자 매니저다.

내레이터 모델은 무관심하게 스쳐가는 관람객의 시선을 낚아채야 한다.

밝은 미소와 친근한 목소리, 은은한 제스처를 안배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눈길을 붙들고 나면 그 시선을 전시제품으로 유도해야 성공이다.

그녀가 늘 “도우미는 절대 '전시장의 꽃' 이 되어선 안된다” 는 말을 되뇌는 건 그런 연유에서다.

얼핏 간단한 일로 여겨지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우선 튀는 복장이나 치장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한다.

화려한 헤어스타일이나 커다란 액세서리를 금하는 것은 물론, 요란한 색깔의 립스틱도 허용하지 않는다.

전체의 균형을 깨는 요소는 절대 금물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이 돋보이고 싶은 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러나 한번 개성이 삐져나오기 시작하면 전시회는 엉망이 됩니다.”

그녀 역시 93년 대전 엑스포를 시작으로 4년여간 도우미 활동을 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 카리스마적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치열한 직업의식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행사를 주관하는 기업의 담당자들조차 '내레이터 모델들은 그냥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는 식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녀는 매순간 자신이 생방송을 연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무려 8시간에 걸쳐 공연하는 여러편의 모노드라마를…. 그래서 진땀이 난다.

“우리 같은 사람은 내레이터 모델이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그 전시회의 성공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미세한 차이가 초래하는 결과의 변화폭은 엄청난 거죠.” 이씨의 운신 폭은 좁아 보인다.

아직은 내레이터 모델을 요청한 기업쪽의 입김이 세고, 그의 주장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모델의 손짓 하나 말투 하나에도 그녀의 지혜가 묻어 있다.

참가 인원을 선택하는 것도 연출의 큰 부분이다.

“다들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개개인의 적성이 많이 다릅니다.

행사의 성격과 잘 맞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녀가 길러낸 도우미만도 약 3백명. 한사람 한사람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늘 기록해야 한다.

도우미 보수가 하루 8만원에서 20만원 정도까지 있다는 점만 봐도 다양성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내레이터 모델을 찾는 행사가 예전의 대기업 전시회 일색에서 중소기업 기념일, 백화점 특판행사, 아파트 모델하우스 전시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적임자를 고르는 작업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그래도 캐스팅이나 현장지도 같은 일은 즐겁다.

이씨에게 항상 버거운 건 세상과 부딪히는 일이다.

마음도 많이 다쳤다.

“에이전시가 난립하고 도우미 지망생이 늘어나면서 보기 흉한 경쟁도 많아지고 가격에 대한 줄다리기도 빈번해졌죠.” 어찌보면 수업료를 내면서 시장경제의 원리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건네는 또다른 어려움 하나. 바로 내레이터 모델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이다.

“일과가 끝난 후 주최측에서 회식 합석을 반 (半)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요. 도우미들은 대개 분노를 느끼지요. 심지어 저녁 식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바꿔달라는 업체도 있습니다.”

이씨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장래 계획을 풀면서 겨우 얼굴에서 그림자가 걷힌다.

“남자 도우미를 뽑으려고 해요. 현장에서 표현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가령, 두명이 내레이션을 주고 받을 때, 여자끼리보단 남녀가 대화하는 게 자연스럽고 전달이 잘될 것이란 얘기다.

혼수상품전처럼 여자 관람객이 많이 찾는 행사엔 아무래도 남자 내레이터 모델이 낫다는 생각, 정말 그럴 것 같다.

ㄴ궁極적으론 아이.노인 모두를 연기자로 등장시켜야죠. 서로 소구하는 대상이 다르잖아요. ”그녀에게선 전시장에 오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내레이터 모델을 통해 더 풍부한 얘기와 몸짓을 담아내고 싶은 욕망이 물씬 풍긴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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