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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알카에다 달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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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9.11 이후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런던의 무슬림 지도자 오마르 무하마드는 "알카에다는 이제 어떤 특정 집단의 이름이 아니다. 이슬람 역사의 한 분수령이다. 무슬림에게 이슬람의 힘을 확신시켜 준 재탄생의 전기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알카에다 달력을 쓴다"고 말했다. 올해는 알카에다력(曆) 3년이다.

'신의 이름으로서의 테러-종교적 무장세력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이라는 책의 저자 제시카 스턴은 자신의 화두를 풀기 위해 6년에 걸쳐 세계 각국 테러리스트를 인터뷰했다. 그가 찾은 답은 '굴욕감'과 '자존심'이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테러리스트는 굴욕감을 느꼈을 때 공격적으로 바뀌며, 테러는 자존심을 회복하는 수단이란 얘기다. 그 과정에서 폭력은 정당성을 얻고 테러리스트는 확신범이 된다.

무하마드에게 9.11은 자존심과 자긍심의 회복이었다. 9.11 이전까지 그가 떨치고 싶어했던 굴욕감은 제1차 걸프전 이후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성지 메카의 나라다. 무하마드는 "미군은 돌아온 십자군"이라고 설교했다.

최근 이라크로 외국인 무슬림 전사들이 모여드는 배경의 하나도 굴욕감이다. 무하마드는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고문 사진을 보고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이 세상 모든 무슬림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첫새벽의 종이 울렸다. 이라크에서 모욕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위해 나서라. 이미 일어난 잔혹 행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이교도들의 만행을 막아낼 힘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역설했다. 런던의 젊은 무슬림이 무자헤딘이 돼 바그다드로 달려갔을 만하다.

테러는 많은 사람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의도에서 무차별적이다. 그중에서도 종교적 배경의 테러는 광범한 집단을 적(敵)으로 상정하기에 거의 무제한적이며, 자기 확신에 차 있기에 무자비하다. 선(善)과 악(惡)의 전쟁에 중립지대란 없다. 파병 결정은 곧 선과 악의 선택이다. 김선일씨의 비극은 이미 전쟁이 시작됐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전쟁에 뛰어들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