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12. 미국인 코치 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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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55년 한국을 방문해 대학 농구 유망주들에게 개인기를 전수한 미국인 존 W 번 코치(뒷줄 맨 오른쪽). 뒷줄 맨 왼쪽이 필자.

대학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미국의 농구 서적을 통해 나만의 기술을 개발, 익히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트위스트 슛이나 비하인드 백패스 등 용어도 낯선 기술을 혼자 연습해 내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선수가 활용하는 기술이지만 당시만 해도 개인기보다 조직력과 체력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나는 질시의 대상이 됐다. 내가 그런 기술을 사용하면 선배들은 "젊은 놈이 건방지다"고 꾸짖었다.

이때 미국인 농구 지도자 존 W 번이 서울에 왔다. 그는 농구 창시자인 네이 스미스의 수제자로 당시 미 스프링필드대 농구 코치였다. 아시아재단에 근무하던 조동재씨가 한국 원조 프로그램에 포함시킨 스포츠분야 사업의 하나로 번 코치를 초청한 것이었다.

나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웰컴 미스터 번'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여의도공항에 나갔다. 몸집이 큰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우리 앞으로 키가 작은 중년 신사가 다가왔다. 그가 번이었다. 한국농구협회는 그에게 실업대표 선수 지도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고집, 대학선수들을 지도하게 됐다.

그는 경복고 체육관에서 오전.오후 두시간씩 각각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나는 개인기를 강조하는 그의 지도에 만족했다.

하지만 번 코치는 국내 농구인들의 보수성 때문에 큰 환영을 받지 못하고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번 코치의 월급은 3000달러였다. 당시 50달러 수준이었던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에 비춰볼 때 넉달 동안 1만2000달러를 받아 간 그는 거물 코치(?)였음이 분명했다.

그가 지도하는 동안 대학생 선발팀은 지붕도 없는 육군체육관(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만 국난팀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모두 무참하게 지는 바람에 그는 냉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지도가 한국농구를 한 차원 발전시킨 원동력이었음을 굳게 믿고 있다. 당시 대학생팀 주전은 조병현.최태곤.백남정.김동하와 나였다. 이 멤버는 훗날 국가대표로 크게 활약했다. 나는 번 코치의 평소 신념도 존경했다. 그는 경기를 앞두고 "경기에서 이기면 그것은 훌륭한 기량을 발휘한 여러분의 영광이다. 진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다. 내 부족함으로 여러분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나는 훗날 지도자 생활을 하며 이 말을 항상 마음에 새겼다.

그가 떠난 후 1956년 1월 대학생팀은 대만에서 열린 장제스(蔣介石) 총통 탄신 축하 4개국 농구대회에 출전했다. 첫 해외 원정이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대만.필리핀.일본에 모두 져 최하위에 그쳤다. 하지만 경기마다 시소게임을 펼쳐 관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대만 신문들은 "19세에 불과한 김영기가 성장하면 한국은 대만.필리핀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나의 플레이를 극찬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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