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서평]현대성과 자아정체성…앤터니 기든스 지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역사의 종언 (終焉)에서 계몽주의의 종언, 그리고 사회학의 종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묵시록 (默示錄) 적 담론 (談論) 들이 세기말 사상의 혼돈스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과연 무엇이 변화했고 변화하고 있는가.

이 변화는 사실인가, 아니면 과장된 것인가.

80년대 이래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탈 (脫) 현대성 논쟁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라 할 만하다.

탈현대성에 대한 사회학적 개입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사회학' 이냐, 아니면 '포스트 모던 사회학' 이냐의 문제로 압축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가 실제로 변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법이 변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자의 흐름을 대표하는 사회이론가로 손꼽히는 앤터니 기든스는 '현대성과 자아 (自我) 정체성' (새물결 刊)에서 현대성의 미시적 기반인 자아의 문제를 새롭게 해부하고 그 위기를 진단한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을 관통하고 있는 질문은 왜 우리 시대에는 삶에서 얻을 만한 것이 없다는 느낌이 갈수록 확산되고 강화되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기든스는 '후기' 또는 '고도' 현대적 상황을 주목한다.

전 (全) 지구화가 강화되고 전통적 규범이 소멸되며 자본주의적 상품화가 심화되는 당대 현실 속에서 자아는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갖는 동시에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후기 현대가 개인의 판단에 대한 최종적 권위가 부재한 사회라면, 자아는 이제 헌신과 무관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떻게 이런 실존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기든스는 '생활정치' 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이 해방정치라면, 생활정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이슈화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정치이다.

낙태에 관한 문제에서 핵전쟁의 위험에 이르기까지 생활정치는 전통적 윤리가 쇠퇴한 후기 현대 생활세계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새로운 규범적 기반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은 갈수록 더해가는 삶의 무력감이라는 실존적 이슈를 사회학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대성은 자유의 제도적 확장을 뜻하지만, 이와 동시에 바로 그 제도가 자아의 실존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배제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책은 후기 현대의 자아가 직면한 신뢰와 위험, 기회와 위협의 이중성을 신체와 욕망, 결혼과 이혼과 같은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현대성의 또다른 얼굴을 드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기든스의 이러한 성찰에는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 는 생태주의의 울림이 깃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새로운 생활정치와 기존의 해방정치의 적극적인 결합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절충적 대안이 최선의 대안인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해방정치와 생활정치의 결합은 규범적으로 정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많은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긴장을 견뎌내고 갈등을 새롭게 통합하는 것은 불확실한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할 몫일지도 모른다.

김호기 교수<연세대·사회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