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뜨거운 드라마 등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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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토요일 오후 8시. 남자는 정부에게 "이혼한 아내를 괴롭히기 위해 양육권을 뺏어왔다"고 말한다. 일요일 오후 8시. 남자는 자식을 친엄마에게 돌려주는 대신 기숙시설에 맡긴다. 아이를 거부하는 정부와 재혼하기 위해서.

지난 주말(19.20일) 저녁,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보던 KBS 드라마 '애정의 조건'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드라마는 중학생(만 15세 이상)도 시청이 가능해, 청소년 보호 시간인 주말 저녁에 방영되고 있다.

MBC 미니시리즈 '불새'는 초등학교 6학년도 시청할 수 있는 '12세 이상 시청가' 등급이다. 그러나 이번주(21.22일) 방영분에도 대낮에 납치를 하고, 음주 운전을 하는 장면이 여과없이 나왔다.

2002년 11월 1일부터 드라마등급제가 실시됐지만, 아직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명확한 심의기준이 없는 탓이 크다. 현재 드라마 등급은 각 방송사에서 자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폭력성.선정성.언어의 부적절성'을 기준으로 해당 연령대에 적합한지를 살핀다는 식의 개괄적인 기준이 대부분이다. 특히, 방송국의 필요에 따라 정할 수 있는 '15세 시청가'의 경우 '청소년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 등의 모호한 기준마저 없다. '심의담당자와 PD가 논의해' 등급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드라마 등에 적용하기 위해서라는 '15세 이상 시청가' 등급은 실제로 성인드라마에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윤간.젖가슴에 문신을 새기는 장면 등 선정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SBS '장길산'도 15세 이상 등급이다.

5월 종영된 SBS '2004 신인간시장'의 경우 제작진마저 19세 이상 등급으로 봤지만, 15세 이상 등급을 받았다. 19세 이상 등급은 청소년 보호 시간대(평일 오후 1~10시, 휴일.방학 기간 오전 10시~오후 10시)인 주말 낮 재방영이 불가능하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일수록 재방 시청률도 높다. 평일 밤 10시 이후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라도 '15세 이상 시청가' 이하의 등급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방송사의 이해 관계가 '고무줄 등급제'의 이유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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