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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반나절 行福] 잠깐 걸으니 고요의 섬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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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 저 다리를 건너면 마음도 열릴까.

▶ 수연산방의 찻집. 상에 비치는 햇살이 차를 데운다.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한 해를 365일로 묶은 건 천체의 운행에 따른 것이겠지만 한 주일을 이레 단위로 묶은 건 인간의 탁월한 지혜였다.

그 아깝고 귀한 주말, 당신의 금쪽같은 시간을 허송하지 않을 나들이 장소를 소개한다. 가깝되 붐비지 않아야 하리라. 큰돈 안 들되 오관을 열어놓을 구경거리 풍성해야 하리라. 나는 지금부터 그런 곳들만 표시된, 새롭고 요긴한 지도 하나를 만들어볼 요량이다. 멀리 가지 말자. 주머니 걱정도 말자. 행복은 가까이 있다. 손닿는 거기, 반나절이면 닿는 거리 안에 있다. 거기 당신과 동행하고 싶다. 함께 가실 분들은 여기, 여기로 모이시길!

서울 성북동 길상사는 열린 절이다. 우선 절문을 통과할 때 눈을 부라리는 사천왕상이 없다. 까마득히 부처님을 올려다보며 계단을 올라갈 필요도 없다. 바로 거기 늙은 느티 서너 그루를 휘돌면 그윽하게 웃으며 아미타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자판기 커피를 빼들고 느티나무 아래 앉아 세상 근심을 저멀리 떼어놓자.

당신이 불자가 아닐수록 더욱 좋다. 뜰에 세워진 관세음보살상을 눈여겨봐야 한다. 고운 눈썹, 둥근 볼, 여린 몸매, 관세음보살인지 성모마리아인지 통 구분할 수가 없다. 가톨릭 신자인 최종태 교수의 솜씨다. 종교 간의 장벽 따위, 마냥 사소하고 부질없을 뿐임을 이 관세음보살상은 수줍고 아름답게 주장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곳은 원래 절집은 아니었다. 대원각이란 요정을 주인 길상화 보살이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만든 절이다.

기둥과 서까래에 오색단청을 입히지 않았고 후불탱화도 오방색을 쓰지 않았다. 먹탱화에 금분으로 윤곽선만 그어, 안 그래도 절제된 절 안이 더 고요해졌다. 극락전 왼쪽, 계곡에 걸린 다리를 건너가 이 집 옛주인 길상화 보살의 공덕비 앞에 잠깐 서보자. 여기서는 돈을 버는 법보다 그걸 잘 쓰는 법을 명상해 봤으면 좋겠다. 혹 결핍과 충만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간결한 비석머리는 주판알인가 했더니 발우의 형상이란다.

길상사가 석가모니불 대신 내세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법당에 모신 건 이 할머니의 원이었다 한다. 연이 닿는다면 당신도 계곡 저 위쪽, 개울가에 새집처럼 걸린 스님들의 요사채를 지나 법정스님에 이어 새 주지를 맡은 덕조스님 거처에서 향좋은 차 한 잔을 나눌 수도 있을 게다.

그게 어렵거든 '침묵의 집'에 들어가 앉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방이다. 명상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굳이 단전에 힘을 주고 가부좌하지 않아도 좋다. 10분만 벽을 향해 고요히! 창밖 나뭇잎이 이마전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걸 느끼기만 해도 충분하다.

덕조스님은 길상사 터도리에 맘먹고 야생화를 잔뜩 심어뒀다. 젊은 한때 길상화보살의 애인이었던 천재 백석은 이런 시를 남겼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덕조스님이 그 시를 알았던가, 특히 취가 많다. 지금은 바위취가 한창이고 곧 개미취가 꽃필 차례다.

길상사는 숲속 절이다. 시내보다 기온이 3도쯤 낮다. 무엇보다 도심에서 가깝다. 4호선 한성대역 6번출구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서 7분이면 닿는다. 일행이 많거든 택시를 타라. 주차장도 충분하다. 눕거나 먹거나 고성방가하지만 않는다면 길상사는 한나절 서늘하게 쉬다 올 최상의 장소다.

길상사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월북한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옛집이 나온다. 당호는 수연산방(壽硯山房), 지금 찻집으로 개방 중이다. 몸체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한 세기 전 개량한옥의 모습을 알뜰하게 보여준다. 앙증맞은 문과 누마루, 자그만 뜨락이 다 단정하고 정답다. 이태준은 여기 살다 1946년 북으로 갔다. 누님의 따님인 생질녀에게 집관리를 부탁하고 갔다. 세월은 흘러 지금 주인은 다시 그 따님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11호, 마루를 두른 난간과 보온을 위한 세 겹 문이 재미있다. 겨울엔 양지바른 누마루에 앉아 뜰을 내다보는 게 좋고 5월엔 꽃핀 라일락나무 아래 앉는 게 최고이나 지금 철엔 달아낸 별채가 서늘하다. 마루에 걸린, 2남3녀가 조롱조롱 매달린 상허의 가족사진에서는 숱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 팠다. 상허는 추사 글씨를 모사해가며 획의 힘과 뜻을 파고들던 열성팬이었다. 문향루(聞香樓) 현판도 자세히 들여다보라. '…수묵체의 필법으로 산그늘이 짙어갈 무렵 어성어성 이 골짜기를 찾아드는 맛은, 나귀는 못 탔을 망정 맹호연의 탐매정취가 없지 않다'던 성북동, 당시엔 이 집앞에 제법 소리나는 개울이 흘렀을 게다. 상허의 심정이 되어 저녁 나절 수연산방에 놀러가자. 손엔 '무서록' 한 권을 들고 가자. 직접 담그는 차맛이 혀에 달고 배즙 오미자 빙수니 죽순 인절미니, 내놓는 메뉴도 얍삽하지 않아서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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