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웰빙] 부침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비가 자주 오네요.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란 말도 있었습니다. 농사짓는데 비가 오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얘기지요. 아버지는 비오는 날이면 비료부대로 만든 우비를 쓰고 일찌감치 논으로 가십니다. 혹시 논에 물이 많아져 벼가 잠기지 않을까, 물이 넘쳐 논둑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보러 가시는 것이죠.

물길을 잡아놓고 돌아오시는 길에 텃밭에서 애호박이며, 오이며, 풋고추 등을 한 소쿠리 따가지고 들어오십니다. 이런 날은 아침 밥상을 물리고부터 어머니가 분주합니다. 뒤뜰에 심어 놓은 부추도 베다가 애호박이랑 풋고추를 넣고 큰 양동이로 가득 부침개 반죽을 만듭니다. 식구가 많기도 하지만 모처럼 기름 냄새를 풍겼으니 동네 사람들과도 나눠 먹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머니가 부침개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할머니는 번철을 손질하고, 아버지는 참숯으로 숯불을 피우십니다. 요즘 같은 프라이팬이 없으니 무쇠 솥뚜껑을 대신 번철로 사용하거든요. 물론 쓰고 있는 솥뚜껑을 쓰는 건 아니고, 솥이 뚫어지거나 깨진 것을 바꿀 때 뚜껑을 따로 두셨다가 사용하는 겁니다. 일년에 설날과 추석날, 어른 생신날, 제삿날, 그리고 이렇게 비 오는 날에요. 쓰고 난 뒤엔 녹슬지 말라고 들기름을 앞뒤로 반질반질하게 먹여놨기 때문에 다음에 쓸 때는 전내가 나지요. 그래서 사용하기 전이면 깨끗이 닦아 다시 기름을 먹이고 쓰는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숯불을 화로에 담아 대청마루에 가져다 놓습니다. 할머니는 그 위에 삼발이와 번철을 올려놓으시고는 기름을 번철에 넉넉히 둘러놓습니다. 번철엔 손잡이가 없으니 호박 꼭지를 잘라 빙빙 돌려가며 구석구석 기름을 먹입니다. 콩기름만으로 부침개를 지지면 느끼하다며 고소한 맛을 더하기 위해서 들기름을 섞는다고 하셨어요.

호박과 부추, 풋고추에 누런 우리밀가루를 섞어 반죽한 것을 한 국자 떠서 얹으면 "치지직 치지직" 맛난 소리와 냄새가 집안에 진동을 합니다. 첫번째 부친 것은 할머니가 맛을 보십니다. 번철이 길이 덜 나서 모양도 예쁘지 않고 간도 봐야 하니 할머니가 드시는 겁니다. 두번째 부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드십니다. 물론 막걸리와 함께요. 나머지 가족은 모두 마루에 나와 앉아 주룩주룩 툇마루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립니다.

식구들이 한 장씩 먹고 나면 이젠 몇 장을 모아 이웃집으로 돌립니다. 뭔가를 남의 집에 가져다 줄 때는 서로 심부름을 하겠다고 합니다. 반대로 뭔가를 빌려오거나 꿔올 때는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하지요. 서로 가지 않으려는 심부름은 칠남매의 막내인 제 몫인데 반해 이렇게 뭔가를 가져다주는 심부름은 바로 제 위의 오빠 몫입니다. 오빠는 한 손엔 부침개를 담은 쟁반을 들고, 다른 손엔 우산을 들고 대문 밖으로 냅다 뛰어나갑니다. 돌아올 때는 그 쟁반에 뭔가가 담겨 있답니다. 그 댁에서도 부침개를 부치는 날이면 그 댁의 부침개가, 그렇지 않다면 배꼽이 볼록한 참외라도 담겨 있답니다. 이런 게 이웃 간의 정 아닐까요?

비 오는 날이 잦은 요즘. 부침개를 부쳐 앞뒤와 위아래 집으로 날라 보세요. 눅눅한 기분이 보송보송해질 겁니다.

노영희 푸드스타일리스트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노영희식 담아내기

부침개는 썰지 않고 그대로 접시에 담아내 찢으면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 하지만 너무 크게 부치면 그릇에 담아도 모양이 안 나고 먹기도 불편하다. 집어가기 좋을 정도의 크기로 썰어서 담거나 처음부터 작게 부치는 것도 방법이다. 찍음장으론 초간장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부침개의 종류에 따라 고추초간장이나 초고추장을 만들어 낸다. 김치 부침개엔 고추초간장(진간장 3큰술, 식초 3/2큰술, 설탕 1작은술, 후춧가루 약간, 청양고추 1개, 양파 1/4개), 애호박 부침개엔 초고추장(고추장 1큰술, 설탕 1큰술, 식초 1큰술)을 권한다.

◆ 노영희씨는 최근 요리 초년생을 위한 초보요리책 '푸드 스타일리스트 노영희의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가 난다 - 칭찬받는 초대 요리'를 발간했다. 랜덤하우스중앙 발간. 9800원. 02-3705-0116.

1. 김치 부침개

■ 재료(6~8인분)=김치 1/4포기(물기 살짝 짜고 500g), 양파 100g, 베이컨 100g, 풋고추 3개, 부침가루 1컵, 물 2/3컵, 식용유 4큰술, 참기름 1큰술

■ 만들기=김치는 물기를 살짝 짜고 송송 썬다. 양파는 채 썰고 베이컨은 1㎝ 길이로 썬다. 풋고추는 송송 썰어서 물에 헹궈 씨를 털어낸다. 볼에 부침가루와 찬물을 붓고 대충 섞는다. 여기에 김치.베이컨.양파.고추를 넣고 섞는다. 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펴서 양면이 노릇노릇하게 지진다.

2. 애호박 부침개

■ 재료(4인분)=애호박 1개(200g), 양파 100g, 청양고추 3개, 부침가루 1컵, 찬물 2/3컵, 올리브 오일이나 식용유 3큰술, 참기름 1큰술

■ 만들기=애호박은 굵기가 고른 것으로 준비해 채썬다. 양파도 채를 썰어 준비한다. 청양고추는 송송 썰어서 물에 헹궈 씨를 털어낸다. 볼에 부침가루와 찬물을 넣고 대충 푼 다음 애호박.양파.고추를 넣고 섞는다. 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펴서 양면이 노릇하게 지진다.

3. 부추 방앗잎 부침개

■ 재료(4인분)=부추 50g, 방앗잎 20g, 풋고추 3개, 부침가루 1컵, 물 2/3컵, 고추장 1큰술, 식용유 3큰술, 참기름 1큰술

■ 만들기=방앗잎은 연한 잎만 뜯어서 씻은 뒤 물기를 털고 숭숭 썬다. 부추는 잘 다듬어 2㎝ 길이로 썬다. 풋고추는 송송 썰어서 물에 헹궈 씨를 털어낸다. 부침가루에 고추장을 푼 물을 붓고 대충 섞는다. 여기에 준비한 방앗잎.부추.고추를 넣고 섞는다. 팬을 달궈 식용유에 참기름을 섞어서 넉넉히 두른다. 반죽을 작은 국자로 하나씩 떠서 얇게 펴 지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