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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군대가 왜 강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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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나폴레옹은 불세출의 명장으로 기록된다. 그에게도 유산 일부를 남겨줄 만큼 고마운 은인이 있었으니 외과의사 도미니크 장 라리였다. 라리는 이집트에서 워털루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빠짐없이 종군했다. 러시아 원정 때는 하루에 200여 회나 수술을 집도한 적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에는 라리가 이끄는 의무부대의 이런 헌신이 뒷받침됐다. 전투가 벌어지면 다수의 부상병이 한꺼번에 발생한다. 시간에 쫓기고 손이 달리는 상황에서 부상병을 신속히 분류·치료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라리는 이를 잘 체계화했기에 ‘트리아주(triage)’라는 프랑스어가 오늘날 국제통용 의학용어로 자리 잡았다. 치료 여부와 관계없이 사망할 자, 즉시 치료가 필요한 자, 치료를 늦출 수 있는 자 등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군의관의 핵심 과제인 것이다.

시장경쟁의 다른 이름은 경제전쟁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무력 대신 경제력(품질·가격)으로 싸우는 전쟁이 전 지구적으로 전개된다. 현 경제전쟁이 각국 지도자의 용렬함, 좁은 애국심, 인기영합주의와 맞물려 보호주의와 통상마찰로 이어질 조짐이 보이면서 세계경제 앞날의 가시거리가 코끝일 만큼 어둡다. 이런 상황은 한국경제의 체질 강화를 요구한다. 유한한 자원을 비효율 부문에서 효율적 부문으로 돌리고, 신규 기업이 일어나도록 여건조성 작업이 줄기차게 진행돼야 지속성장이 가능하다.

만일 치열한 전투소식에도 불구하고 야전병원에 실려 오는 부상자가 적다면, 헛소문이거나 후송 과정에 분명히 이상이 있음이 의심된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세계경제의 불황은 실상이다. 이제는 치욕의 거리로 불리는 월가의 일류 금융회사들이 퍽퍽 넘어지고 대형 실물기업들도 도산의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불 끄기에 급급한 미국의 호소에 프랑스·독일 등 다수 국가가 나 몰라라 하면서 미국의 경기부양책에 무임승차 기회를 노리고 있다.

현재 상황은 먼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 자신의 생존전쟁이다. 강 건너 불이 아니라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공조해야 한다. 기다리면 저절로 남의 손으로 꺼질 불이 결코 아니다. 10여 년 전 환란 때와 여건이 다르다고 하지만, 경제 체질 강화작업을 강도 높게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환란 이후 살을 도리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 노력이 있었기에 기업의 재무구조도 개선할 수 있었고, 한국 상품이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자동차·전자 등 실물 기업계의 세찬 구조조정 칼바람이 보도된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요즘 고환율과 역(逆)샌드위치론의 일시적 모르핀 효과가 작용하고 있음인가? 세계경제를 관망하자는 자세가 조야에 팽배해 보인다. 게다가 대량실업 발생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부는 기업 부도 방지와 구조조정이라는 엇갈린 신호까지 발신하고 있다.

독자생존 여부를 판가름하는 마술적 척도인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유지 때문이라고 하지만, 금융회사들의 대출자산 신용등급 매김이 느슨해 보인다. 기업은 외부 세력을 동원해 구조조정을 회피하거나 아예 법정관리의 보호막 뒤로 도피행각을 도모하고, 국민경제적 실익이 의심스러운 해외사업을 방패로 삼기도 한다. 이렇게 장난질치는 기업은 등급을 낮추어 불이익을 주어야 하고 외부 영향의 실체를 밝혀 공개해야 한다. 야전병원이 꾀병환자를 물리치듯이 채권금융기관이 부실 기업에 단호해야 한다. 나폴레옹 군대를 강할 수 있게 했던 야전병원처럼 구조조정이 가동돼야 한국경제가 건실해진다.

김병주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