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화비전'이 의미있자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원주 교외에 창조와 생명에 대해 사색하고 토론할 공간 '토지문화관' 을 만들기로 작정하면서 소설가 박경리 (朴景利) 는 그 결심의 배경엔 러시아 지식인에게 공감된 바도 인연이 됐다고 한다.

옛소련 붕괴 이후 경제.사회적으로 파국으로 치닫던 러시아의 앞날을 절망하면서도 그 지식인은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고 절규했다는 것이다.

문화 일등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던 애국자 김구 (金九) 처럼 박경리 또한 세계 4대 강국의 압박 틈새에서 우리 사회가 살아 남는 길은 문화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때는 목이 멘다.

우리가 자나 깨나 경제형편을 염려하고 정치판세를 걱정하지만 이것은 삶에 관련된 문제고, 정작 꿈에 대한 지향이 없고선 발등에 떨어진 현실 삶이 안고 있는 문제의 돌파가 불가능하다.

여기에 문화의 중요성이 정당하게 성립한다.

문화는 삶이자 동시에 꿈이며, 또한 이 둘을 이어주는 고리인 것이다.

며칠전 정부의 한 특별위원회가 '문화비전 2000' 안을 발표했다.

21세기가 문턱에 다다른 시점에서 한국 사회의 번창에 필수라 생각되는 '문화를 주제로 삼는' 발상법과 과제와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런 보고서의 출현은 우리만의 궁리가 아니다.

선진국 등지에서 경제 번영 덕분으로 문화 향수의 과실을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생명력 있는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고선 한 단계 높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여겨 제가끔 문화발전 계획을 만들고 있다.

우리 '문화비전 2000' 은 문화발전의 원칙을 제시한데 이어 기념사업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2000년 상징탑 건립, 익산 미륵사지같은 문화유산 복원, 문화관광벨트 조성 등이 포함돼 있는데 모두가 그럴듯한 사업들이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아무리 망라적으로 제시해도 그게 문화 발전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문화입국은 문화현장이나 축제로만 그치지 않고 바람 같은 신명에서도 그 향기가 느껴져야 할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박 겉핥기에 그쳤다고 비판할 수도 없다.

이런 유의 보고서는 계속 발전되고 확장돼야 할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나열된 것 가운데 한 둘 구체적 사업만이라도 착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 말하고 싶다.

필시 세계의 관심인사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같은 나라나 도시의 얼굴이 될만한 활동이나 현장을 갖자는 그런 취지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선 도무지 보고서가 제안한 문화사업이 하나도 구체화될 것 같지 않다.

대권 후보들의 부덕과 비리 들추기로 날새는 판국에 문화 논의가 끼어들 틈새가 없다.

선과 미의 고양도 문화이지만 악과 추 (醜) 의 지양도 문화 영역에 당연히 포함되기에, 진선진미 (盡善盡美) 를 논하지 못할지언정 심각한 사회병리만 따져주어도 문화적 논의라 치켜세우고 싶은 심정이다.

학업의 차질 때문에,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끝에 중.고생들의 자살이 속출해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 하는 대권후보를 만나지 못하는 심정은 참담할 뿐이다.

저질 대권싸움이 문화에 미치는 해악은 이념 대결이 막을 내린 지금 시민사회가 살 길은 신뢰의 확대에 있다고 한 철학자 후쿠야마 (福山)에게 비춰보면 짐작할 수 있다.

문명사회가 되자면 그 구성원들 사이에 안정되고 지속적인 높은 신뢰성이 주조가 되는 풍습과 윤리가 확산돼야 하는데, 이것은 의도적인 정치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조성될 수 있을 뿐이라 지적한다.

좋은 사회풍습은 정치가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요지다.

문화가 별건가.

말에 안정감을 주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사이에 개인 각자 모두가 세계의 중심이고 감동의 주인임을 실감하자는 요구다.

그러니 감동은 못줄지언정 러시아 지식인의 말처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복원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