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대학생, 자기만의 ‘영혼의 결’ 찾아 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6호 34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다. 시인은 이 시의 초점을 3연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보았다. 하지만 모든 문학 작품은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갖는 법. 김현승(그 또한 시인이다)은 이 시의 가치가 오히려 1연과 2연에 있다고 말한다.

김현승은 ‘내 누님 같은 꽃이여’라는 비유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무난한 표현 수법이며, 이 시의 특징을 그런 무난한 수법에다 두는 것이라면 이 시는 그저 무난한 정도의 시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시의 매력을 1연과 2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봄에 우는 소쩍새와 여름의 천둥을 언급함으로써,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로되 얼마나 많은 섭리와 준비와 동원과 참여가 있어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신비함과 존엄성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시인과 평론가, 두 사람 중 누가 시의 본질을 제대로 읽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독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하지만 같은 사물을 보고도 각자의 내적 성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읽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래서 미국 역사가 칼 베커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을 명료하게 밝혀주는 책, 그들의 동기를 잘 표현해주는 책, 혹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바로 그 사상을 그들에게 제시해주는 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요컨대 김현승은 ‘자신의 사상을 명료하게 해주는 부분, 자신의 동기를 잘 표현해주는 부분, 또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사상을 제시해주는 부분’을 이 시의 1연과 2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사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인간의 삶을 크게 나누어 두 타입으로 보았다. 즉 헬레니즘적인 낙천 향락적 타입과 헤브라이즘적인 금욕적 진지한 타입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을 후자, 곧 헤브라이즘적인 타입으로 파악했다.

그는 1975년 4월 11일 재직하던 숭실대 채플 시간에 기도하던 중 쓰러진 뒤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런 그가 화려한 꽃보다는 진실한 열매를 소중히 여기고 외향적인 웃음보다는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미와 가치를 찾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헤브라이즘적인 그의 삶의 태도는 이 시에서 외향적인 부분이라 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보다도 1연과 2연의 내향적인 가치에서 이 시의 진정한 매력을 찾게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영혼의 결’을 갖는다. ‘자아’라고도 ‘개성’이라고도 ‘달란트’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쉽지 않다. 힌트는 칼 베커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책 읽기다. 광범위한 독서가 필요하다. 문학·철학·역사·종교·건축·예술·자연과학 등 장르 구분 없이 널리 읽을 일이다. 차츰 자기 ‘영혼의 결’에 맞는 사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아 발견의 시동이 걸리는 셈이다. 그 후 범위를 좁혀 자신의 생애사업(life work)을 찾아낸다. 이제 자아실현의 궤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휴대전화와 컴퓨터·게임물 등에 밀려 한국 사회의 독서량은 뒷걸음치고 있다. 대학마다 새내기들이 밀려들고 있지만 그중 몇 명이나 독서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생애사업을 찾아낼 지 궁금하다.

현대는 선전의 시대, 광고의 시대다. 온갖 종류의 상업적 프로파간다들이 파상적으로 밀려온다. 그것들이 노리는 목적은 같다. 그들이 떠벌리는 말을 사람들이 믿어 주기를, 나부껴 주기를 하나같이 노리고 있다. 그들이 겨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시민을 소아화(小兒化)하는 데 있다. 오직 자신의 ‘개성’을 발견한 사람만이 소비 사회의 선동에 나부끼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오직 자신의 ‘영혼의 결’을 찾아낸 사람만이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지 못한 인생은 제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영원한 사춘기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