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과 재판 관여 사이, 곡예하는 법관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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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35면

1970년대 내가 형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 군사정권은 학생시위나 체제비판적인 필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판사들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당시 많은 법관이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했다. 그러나 사회가 전반적으로 민주화된 요즘 과거처럼 외부에서 법원 재판에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논란이 된 신영철 대법관의 e-메일 사건처럼 법원 내부에서 행해진 소위 사법행정적 지시가 재판의 독립성 침해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법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 발표한 ‘국민 법의식 조사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법’이라는 단어에 대해 응답자들은 대부분 권위적이라거나 불공평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원인에 대해서도 “법대로 살면 손해를 보니까”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이는 사법부가 신뢰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가운데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시위 사건 재판에 관여한 것으로 의심을 살 만한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대법원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더욱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그동안 누적돼 온 법원 조직의 관료화·서열화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상하 위계질서가 분명한 법원 인사제도는 법원 조직을 과도하게 관료화·서열화하고 법관들이 인사권을 지닌 상급 법관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법원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사법행정 분야와 법원 본연의 재판업무 간 구분이 모호해 상급 법관의 재판 관여 가능성은 언젠가 불거질 수밖에 없는 잠재된 불씨였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의 하나다. 법원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재판을 절차에 따라 지체 없이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법원장으로서는 국민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법행정의 범위 내에서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법관의 재판 진행을 독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 대법관의 이번 행위는 사법행정에 의한 합리적 지시의 범위를 다소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 대법관의 재판 관여 문제는 그가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 재임할 당시 법원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논의돼 법원 스스로 해결 방안을 모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법원이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의 논의에 끌려 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잦은 지방전보와 과중한 업무부담 등 어려운 근무여건 속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대다수 법관이 행여 재판업무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에 회의를 품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번 논란이 어디서 시작됐든 간에 법원은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법원은 우선 사법행정의 기준을 마련해 상급 법관이 사법행정이라는 명분으로 법관 재판에 관여하는 일이 일절 발생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법관 인사제도의 개선이 동반돼야 법관들이 인사권을 가진 상급 판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80년 법관회의개혁법이 제정돼 연방항소 순회법원의 법관회의에 연방 1심법원의 법관들에게 각종 징계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여됐다. 그러나 관료주의적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법관들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미국 사법부의 경우 개인주의라는 문화풍토와 다양한 유형의 판사 신규 채용, 판사들을 경력 있는 변호사 가운데 충원하는 법조일원화(法曹一元化) 전통으로 인해 관료화 정도가 훨씬 약하다. 이는 판사들의 개인적 자율을 고양하고 사법권 독립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재판의 독립성이 확립돼 법관이 소송 당사자는 물론 다른 어떠한 국가기관이나 사회세력, 상급심 법원 또는 상급 법관의 지시·명령으로부터 독립해 헌법과 법률,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하게 된다면 우리 국민의 법의식은 현저하게 개선될 것이다. 법원의 공정한 재판을 통한 권리 보호가 가능하다면 국민은 더 이상 법이 권위적이거나 불공평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법과 재판에 대한 신뢰가 확보돼야만 준법의식이 고양될 수 있으며 국민은 ‘법을 준수하면 손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경제나 군사력보다 더 중요한 국민의 믿음(信)을 확대 재생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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