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정치 부양책이 더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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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증시가 폭락하자 또다시 금융대란이니 공황이니 하는 끔찍한 단어들이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는 뭘 하느냐며 몰아세운다.

강경식 (姜慶植) 경제부총리에 대한 문책론을 들먹이는가 하면, 증시를 살리기 위해 1조원의 한은특융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부총리 갈아치우고, 돈 찍어서 주가가 오를 바에야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욕먹을 소리지만 최근의 주가폭락 현상은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경제가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가는데 주가가 멀쩡하다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경제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증시는 죽지 않았으며, 아직도 '희망 있음' 을 입증해주는 셈이다.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부양책 (浮揚策)' 촉구부터가 못마땅하다.

89년 12.12조치를 포함해 과거 경험으로 봐도 이른바 증시 부양책이 성공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시장만 망쳤던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가만 떨어지면 부양책을 안쓴다고 정치권이고 언론이고 야단들이다.

물론 증시 침체는 여간 고통스러운게 아니다.

투자자들의 손해는 물론이고 직접금융이 막혀 기업들의 목을 조른다.

더구나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그 파장과 부작용이 그전 같지 않다.

외국 자본이 주식을 팔고 나가는 바람에 환율을 끌어올리고, 급기야 외환 관리의 근본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증시 안정은 매우 시급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부실기업 주가가 폭락하는 것을 누군들 시비하겠는가.

오히려 무너질 기업은 무너지고, 떨어질 주가는 충분히 떨어져야 경제도, 증시도 제대로 살아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개별기업의 잇따른 부도만으로는 최근의 증시폭락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문제는 경제 전반에 깔려 있는 '불확실성' 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무엇 하나 예측 가능한 것이 없다는게 주식시장의 최대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정치문제가 돼버린 10조원의 빚덩이 기아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기아는 3개월이 넘도록 한국 금융시장 전체를 옥죄고 있다.

금융만 망치는게 아니다.

경제의 틀이 뒤틀리고 흐름 자체가 한없이 꼬여들고 있는 형국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이처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에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말 한마디 없고, 정치권은 하기 좋은 소리만 계속하고, 관련 은행들은 눈치만 살펴왔다.

12월 대선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자는 식이다.

그동안 경제가 어떻게 골병이 들든 모두가 관심 밖이다.

죽기살기로 덤벼들어도 경제 회생이 될까말까한 판에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경제 걱정은 그야말로 말뿐이다.

폭로전에 이르러서는 더 할말이 없다.

재계를 다시 가시방석에 올려 놓은 것은 물론, 더구나 수백개의 계좌번호를 까발린다는 것은 주식시장엔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주가는 경제의 거울이다.

경제 회생에 훼방을 놓았던 당사자들이 막상 주가가 떨어진다고 호통치고 있으니 웃지 못할 난센스다.

주식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방법은 어렵지만 명백하다.

지금부터라도 경제를 경제원리에 따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다.

정부도 말로만 시장원리를 떠들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또 시장의 실패라고 판단하면 욕을 먹더라도 정부가 소신을 갖고 간여해야 한다.

그러자면 발등의 불인 기아 (起亞) 문제부터 더 이상 질질 끌게 아니라 조속히 결말을 내야 한다.

정치권이 이 시점에서 경제를 돕는 길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의 경제 걱정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설수록 주가는 더 떨어질 것이다.

증시 부양책을 촉구할게 아니라 벼랑 끝의 정치를 살리는 부양책이나 강구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이다.

이장규 <경제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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