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와의 연락이 두절된 뒤 어떻게 조치했나.
"통신 사정이 좋지 않아 6월 2일께 팔루자 기지에 상주하는 한국인 우리 직원과 통화할 수 있었고 김씨가 5월 31일 기지를 떠났다는 걸 확인했다. 출장예정지인 모술에 바로 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종과 교통사고 등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탐문을 계속했다."
▶ "어찌 이런 일이…." 한 시민이 23일 서울역에서 김선일씨가 피살됐다는 TV 보도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장문기 기자]
-억류 중이란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았나.
"현지 직원들을 팔루자 지역에 보내 탐문하는 과정에서 6월 10일께 무장세력에 억류된 사실을 알게 됐다. 직원이 팔루자 근처에서 김씨가 타고 갔던 GMC 차량을 보았다고 보고해왔다."
-그 뒤 상황은.
"현지 직원과 이라크 변호사를 보내 두차례 정도 석방교섭을 했고 현지 직원만으로도 여러 차례 협상했다. 협상은 무장세력 간부를 중재자로 해 진행됐다. 납치범 측은 처음엔 김씨 생사 확인조차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사를 알아야 요구조건을 들어줄 것 아니냐'고 하자 생존을 확인해주면서 '한국인이니까 살려주겠다'고 해 석방될 것으로 믿었다. 18일에는 '곧 풀어줄 것'이라는 답변까지 들었다."
-왜 대사관 신고를 미뤘나.
"(10여초간 침묵하다가) 우리 협상팀을 너무 믿었다. 납치범 측이 계속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도 강심장이 아니다. 그들이 김씨를 당장 죽이겠다고 했다면 왜 신고하지 않았겠나."
-김씨와 동행했던 경호원은 어떻게 됐나.
"36세의 이라크인으로 아직도 생사가 불분명하다. 그의 가족들이 사건 발생 후 경찰이나 당국에 신고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모술에는 왜 갔나.
"쿠웨이트에서 원청회사 직원들이 오기로 돼 있어 김씨 문제도 상의하고 부대이전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할 겸 갔다."
-모술에서 미군 측과 김씨 석방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나.
"미군 측은 만난 사실이 없다. 다만 원청회사 측에 보고한 만큼 당연히 미군 측에도 통보됐을 것으로 보았다."
-왜 진술을 번복했나.
"21일 모술에서 바그다드로 내려와 대사관 관계자를 면담한 뒤 그날 밤 많은 고민 끝에 모든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나도 기억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직원들을 모아 사실관계를 종합한 뒤 보고서를 만들어 22일 대사관에 가 아는 대로 모든 사실을 진술했다."
-사건 발생 초기에 대사관에 신고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나의 불찰이었다. 협상팀을 너무 믿었다. 내 잘못으로 한 사람의 목숨을 잃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바그다드=연합]
사진=장문기 기자<chang6@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