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 활동 늘었는데 적당한 호칭 없어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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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언니, 잠깐만 비켜주실래요?" "응?명숙씨구만. 그런데 언니가 뭐야,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

벌써 4년째 수영을 배워오고 있는 주부 유명숙 (34.서울강남구청담동) 씨는 수영장에 가면 아는 사람들이 꽤 많고 친하다.

그런데 그에게 제일 당황스러울 때는 바로 나이많은 이들에게 '형님' 이라고 호칭해야 할 때. 동서도 시누이도 아닌 이에게 '형님' 이라고 부르려니 영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곳에선 그것이 아예 규칙처럼 되어 있어 다른 호칭을 쓰려 하면 오히려 이상해한다.

주부 양인경씨 (36.서울양천구목동) 의 경우 자신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호칭이 '아무개 엄마' .그래서 아이들을 통해서 알게 된 엄마들에게도 꼭 이름을 물어 '은정씨' '춘희씨' 하고 부른다.

5살 이상 연상일 때는 '이모' 라고 부른다고. 이렇게 취미활동등으로 만남이 많아진 전업주부들에게 서로간의 호칭이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다.

그간 어려서는 '가게집 큰딸' , 결혼 후엔 '이계장 부인' , 아이를 낳으면 '보람이 엄마' 등 부모나 남편, 자녀를 통한 관계적 호칭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 상대의 이름 또는 직위로 부르거나 불리는 것은 학창시절이나 직장생활에서뿐이다 보니 주부들간의 모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색하기만 한 것.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계질서나 신분등에 신경을 많이 써 적당한 호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 젊은 학원강사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주부학생들에게 '어머니' 라고 호칭했다가 '나이는 많아도 미혼' 이라는 여성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을 정도. 사실 호칭은 서로의 관계를 친숙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부 김은하 (29.서울서대문구홍은동) 씨는 얼마전 동네길가에서 남편 직장선배의 부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어떻게 아는 척을 해야 할 지 몰라 그냥 지나친 경험이 있다.

남편과 친한 선배의 부인인데다 같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개인적으로도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상대를 '사모님' 이나 '아무개씨' 라고 부르기는 어색했다.

또 친하지도 않은데 '언니' 라고 하면 건방지게 여길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남편처럼 '형수님' 하거나 '아무개 어머니' 라고 부르기는 스스로가 싫었다.

나중에 그 선배부인이 대학원을 다닌다는 것을 알고 성 (姓) 을 붙여 '안선생님' 이라는 호칭을 찾아내 사용하고 있는데 그쪽에서도 듣기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고.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여성들간의 호칭체계에 관해 아직 표준화된 규범은 없는 상태. 국립국어연구원의 정희원 (鄭稀元) 학예연구사는 "호칭이란 실생활과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지정하고 따르도록 하기보다 가장 정서적으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준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며 아직은 과도기단계임을 인정했다.

관계가 조금 가까워지면 서로의 호칭에 대해 상의해 서로에게 거부감이 없는 것을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 아직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결혼한 여성을 높이는 말로 '여사' 라는 호칭을 쓰면 의외로 편할 때가 많다.

일찍 손자를 본 50대 초반 여성을 무조건 '할머니' 라고 부르는 것은 의외로 섭섭한 감을 줄 수 있으므로 '여사님' 이나 '선생님' 등의 호칭을 쓰는 것이 무리가 없다.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을 부를 때는 직업과 관련된 호칭을 성과 함께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는 전업주부를 '사회주부' 로 표현하는 한국여성민우회는 회원들끼리 '아무개선생님' 으로 부르는데 서로를 고무시키고 외부인들에게도 상호존중의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제서야 남성위주의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점이 드러나고 있다" 고 지적한 이화여자대학원 김은실 (金恩實) 교수 (여성학) 는 "여성들이 호칭문제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그리고 " '아무개씨' 란 호칭이 당장은 어색할 수 있으나 자주 사용하다 보면 남성들 사이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것" 이라며 이의 적극적인 활용을 권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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