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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쓸 일보다 몸 쓸 일이 더 많더라” … 전체 의원의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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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8대 국회 초선 의원은 17일 현재 131명이다. 전체의 44.6%로 절반에 가깝다. 한나라당의 경우 170명의 의원 중 초선 의원 수가 90명으로 절반을 넘는 53%나 된다. 초선 의원들끼리만 똘똘 뭉쳐도 웬만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셈이다. 하지만 18대 국회가 닻을 올린 지 1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초선들의 참신한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 오히려 당론과 당론이 맞부딪혀 평행선을 달리는 지도부 싸움에 치여 최장기 본회의장 농성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록만 쌓이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를 보여 주겠다”고 국회 개원식 때 선서했던 초선들은 좌절만 실컷 맛봤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선배 의원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초선이 살아야 정치가 산다”고 말한다. 초선을 살려 정치를 살리는 방법을 찾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기대=“싸움하고 투쟁하는 정치가 아닌 일하는 정치를 보여 주고 싶다.” 지난해 5월 국회 개원식에 참석한 한나라당 권영진(서울 노원을) 의원의 말이었다. 권 의원은 1990년대 중반 정치권에 몸담은 이래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실패와 본인의 낙선을 경험했다. 그런 만큼 정권 교체에 이은 금배지는 소중했다.

같은 당 김용태(서울 양천을) 의원은 “두려운 것은 오직 국민뿐이고 믿을 것도 국민뿐”이라며 “그들이 원하면 용감하게 밀고 나가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었다. “국민 현장과 정치가 너무 떨어져 있다는 목마름이 있었다. 정치가 더 이상 구중궁궐 속 딴 나라 사람들 얘기가 아닌, 국민의 피부에 닿게 하고 싶다.”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을 지낸 같은 당 현기환(부산 사하갑) 의원도 기대가 충만했었다.

특히 전직 장·차관급 인사들이 영입된 민주당 초선 의원들의 중량감은 여당 못지않았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비례대표) 의원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남북 관계 안정화와 북한 이탈 주민 사회 정착 지원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백재현(광명갑) 의원은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며 “웃으면서 세금을 낼 수 있는 정책을 펴 나가겠다”고 희망을 말했다. 중소기업 중앙회장 출신인 자유선진당 김용구(비례대표) 의원은 “중소기업들의 목소리를 담은 법률 개정안을 만들겠다”고 했었다.각양각색이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건 18대 국회 초선들의 공통분모였다.

◆좌절=1년이 다 돼 가는 지금 그들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졌다. “할 일은 많은데 여야 정쟁으로 국회가 허송세월을 하다 보니 국민 보기가 미안하다”(한나라당 김성식 의원·서울 관악갑)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초선들은 지난 1년간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정쟁으로 점철된 정치권 ▶강제적 당론 속의 무력함 등을 꼽았다. 특히 폭력으로까지 이어진 정쟁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보좌관과 구청장을 거친 이진복(부산 동래) 의원은 지난해 말 예결위 파행 때 민주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는 “그런 데 불려 다니다 보면 ‘내가 이러려고 의원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 많이 든다”며 “의정 활동의 포부가 하나 둘 꺾여 가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민주당 이춘석(익산갑) 의원은 “실질적으로 큰 의견 차이가 없음에도 여야가 반드시 자기 것만 통과시키려고 싸우는 모습에 국민의 비판이 더욱 높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비례대표) 의원은 “국회에 오니 머리 쓸 일보다 몸 쓸 일이 더 많더라”고 하소연했다.

초선 의원들이 꼽은 가장 큰 벽은 당론이었다. 여당이 더욱 심했다. "당론은 괴물”(현기환 의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론 결정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초선들은 정해진 당론 앞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비핵·개방·3000’을 비롯해 정부의 주요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소신을 나타냈던 한나라당 홍정욱(서울 노원병) 의원은 “직·간접적으로 당 지도부로부터 경고를 들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희망=숫자는 많지만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해 무력감을 느꼈던 초선들이 요즘 ‘세력화’에 눈뜨고 있다. 소규모 친목모임에서부터 스터디그룹까지 다양하다.

김성식, 정태근(서울 성북갑) 의원 등 초선 의원 모임인 한나라당 ‘민본21’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이어 온 세미나 결과 ‘선진 정치를 위한 법률 개정 초안’을 마련했다.

당내 최연소인 김세연(37·부산 금정) 의원을 포함해 김동성(38·서울 성동을), 홍정욱(40), 강용석(41·서울 마포을), 김영우(42·포천-연천) 의원 등 한나라당 30, 40대 의원들은 지난달 26일 오찬을 함께했다. 이들은 “젊은 의원들이 똘똘 뭉치자”고 결의했다.

민주당은 현안별 스터디를 통한 초선들의 세력화가 이뤄지고 있다. 박선숙(비례대표) 의원은 “정무위 내 키코 스터디 모임, 원혜영 원내대표의 생활정치연구소 스터디 모임 등을 통해 공부하고 의견을 모은다”고 전했다.

10여 년 전 초선을 경험한 한나라당 남경필(4선·수원 팔달) 의원은 “공부하고 무리 짓고 외치는 것 이 세 가지가 초선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가영·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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