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로 가는 마음]3.설악산 봉정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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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산이 탄다.

그 속에 설악이 붉게 물들며 새로 태어난다.

새 옷 입고 새로 태어나는 설악이 황홀히 서서 나를 부른다.

가슴 설레는 이 시간, 나는 산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저 산으로 가야 한다.

붉은 잎사귀 사이로 난 오솔길, 돌 사이로 난 길, 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산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고 나무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며 별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 듯이, 산사로 가는 길 또한 나를 향해 가는 길이기에. 설악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산이다.

가을이 이곳에 제일 먼저 마음을 깃들이고 하늘도 이곳에 처음으로 불을 내려 지상을 물들인다.

설악은 하늘의 첫마음을 받은 산. 그러기에 단풍빛이 가장 곱고 산의 자태 또한 신성하다.

이런 때 설악 어디를 찾아가든 도량 아닌 곳이 있으랴. 산 전체가 큰 절이다.

그러나 나는 해마다 산이 이렇게 아름답게 타며 나를 부를 때면 설악의 정점 봉정암을 찾는다.

봉정암이 어디 있는가.

산에 있고 하늘에도 있다.

산과 하늘이 맞닿는 곳. 반은 하늘이 지어주고 반만 산이 지은 암자.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았기에 새와 구름의 집. 그의 이마를 바람의 손이 짚어주고 귓속엔 언제나 별 흐르는 소리 가득하다.

가을이 그의 첫사랑을 여기 놓고 얼굴 붉힌다.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인제군 용대리에서 시작된다.

여기 와서 신발끈을 고쳐 매고 물소리 새소리 구름 머무는 소리로 깊어지는 백담계곡을 밟아야 한다.

이 계곡에 들어와 몇 발자국만 걸어도 그가 누구든 벌써 예사 사람이 아니다.

들어갈수록 골짜기는 깊이 열리고 만나는 봉우리 더 높아 그도 그에 따라 깊고 높게 열린다.

길 따라 흐르는 물의 백 개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치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산문 (山門) .연꽃보다 더 오묘한 구중심처의 이 산문 깊숙히 들어서면 귓가에 넘치는 물소리가 모두 부처님 설법으로 들리고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전부 오도송 (悟道頌) 이며 우거진 쑥대풀과 억새꽃이 다 시 (詩) 이다.

내설악에 핀 만산홍엽은 다른 곳의 그것과는 다르다.

빨강.노랑.초록의 삼색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 데다 골짜기를 굽이치는 옥색 물빛에 쪽빛 하늘, 그리고 거기 점점이 뜬 흰구름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비경 (秘境) 이다.

밤에는 우주 별들이 모두 이 골짜기 물로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

이 광경을 보는 모든 이가 그 속으로 빠져들어 영원히 길을 잃고 싶은 충동을 어찌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담계곡에서 수렴동계곡까지가 다 이런 길이다.

이 길에 영시암도 지나고 오세암 가는 갈림길도 만난다.

영시암은 사방에 솟은 산봉들 속에 손바닥 만한 하늘을 지붕으로 이고 물소리에 묻힌 암자다.

영시 (永矢) 란 이 명산 속에 영원히 은거하며 시끄러운 세상으로는 다시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의 뜻이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좁은 계곡으로 들어선다.

하늘은 더 작아지고 물소리는 한량없이 높다.

설악에 선경 아닌 곳이 없지만 바로 여기가 설악에서 단풍으로 가장 절경인 곳. 수도 없이 고인 못과 폭포를 보며 다시 계단을 올라 만나는 쌍폭은 신비 그 자체다.

우주의 아름다움이 여기 다 모여 뽐낸다.

물소리에 섞여서 그냥 바라볼 뿐, 여기서 인간이 무엇이며 내가 누군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속되고 어리석다.

깎아지른 봉봉이 타고 있는 황홀경에 푹 빠져 무아 상태로 헤매면 최상일 따름이다.

산사를 찾아 이 눈부신 길을 오르다보면 좁다랗게 놓인 길에 떨어진 노랗고 빨간 단풍 잎사귀 옆으로 난 사람의 발자국이 그렇게 깨끗해 보일 수가 없다.

고라니 발자국 같아 혹은 먼저 간 사슴 발자국 같아 아침에 새로 핀 산 공기가 그 냄새를 맡는 듯하고 햇살도 그것을 만지고 있는 듯하다.

이 발자국을 따라서 땀으로 몇 번을 더 목욕을 하고 나면 사자바위 옆으로 오르는 하늘벽 같은 언덕을 만나고, 이 언덕을 한참 기어오르면 드디어 하늘 아래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버티어 선 용아장성 끝자락에 감싸인 봉정암이 멀찍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백담 입구로부터 무려 일곱 시간. 내가 이 험한 봉정암 길을 처음 오른 것은 오래 전 일. 그러니까 1950년대 중반 중학교 3학년 때다.

이상하게도 우리의 담임은 수학여행하면 으레 가는 남쪽 문화유적지를 택하지 않고 어린 우리를 데리고 인적미답의 이 원시림을 탐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용대리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길도 지금과는 달리 돌을 밟고 물을 이리저리 건너뛰었다.

물 속에 누운 산과 그 속에 깔린 단풍의 비단폭도 밟으며 건너뛰었다.

그 길이 그랬거늘 그 다음의 길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아무도 손대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처녀림 속에 곱게 붉은 단풍과 물소리만 무섭도록 가득했다.

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인도하는 사진작가를 따라 몇번이고 길을 잃고 주저앉거나 다시 돌아서야 했다.

어쩌다 만난 희미한 길에는 낙엽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고, 그런 길 옆에는 천년 고목이 쓰러져 썩어갔다.

물가에는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은 괴목이 수두룩이 널려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기암괴석의 산이 붉은 잎사귀를 껴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산 전체에서는 싱그러운 향내가 났고 골에서 피어나는 새벽 안개는 햇살에 달아나며 머리를 혼란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암자들은 폐허가 되고 봉정암은 주인을 잃은 채 우리를 맞았다.

오직 구름과 새와 바람 만이 이 폐허를 지켜주었다.

나는 이 산정에서 잠들지 못한 채 꼬박 뜬 눈으로 새야 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하늘에서는 주먹 만한 별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천 길 아래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가끔 섞여 울리는 암자의 풍경소리와 함께 더욱 괴괴하게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 때의 그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그 후 수도 없이 다시 찾은 봉정암. 오르는 길에 구름이 아침 산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는가 하면 봉정암 뜰에 서서 구름 안개 가득한 대설악의 장관을 굽어보고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잃은 때도 있었다.

산 속에서 산이 깨어나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길을 잃고 낙엽만 쓰고 잔 적도 있었다.

그 때 그 끝에서 언제나 봉정암이 내게 감로수 한 모금을 내밀었다.

봉정암은 하늘의 샘물이다.

삶의 절정에 서서 마시는 물. 우주의 고요가 머문 곳. 자장율사가 이곳에 불사리 (佛舍利) 를 모신 것도 그 까닭이다.

잃은 자나 얻은 자 모두에게 내어주는 생명수. 이것을 마시러 나는 오늘 여기 또 왔다.

땀을 닦고 물을 마시고 발 아래 산을 굽어보니 불타는 능선들이 천만의 거센 파도로 나를 향해 몰려든다.

저 파도 봉우리들이 다 연꽃잎이다.

아, 오늘은 이 연꽃잎 속에 감싸여 벌레처럼 오무리고 하룻밤 자리. 다시 하늘 가득히 쏟아지는 별 비 맞으며.

시인 이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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