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올브라이트와 미국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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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 메들린 올브라이트는 핸드백을 들고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부하 직원들의 몫이다.

93년 유엔주재 대사로 임명된 후부터 그래왔다.

어느 직종보다 품위를 중시하는 외교관들이지만 보스의 립스틱과 브러시등을 들고 따라다니는데 군말들이 없다.

올브라이트의 당당한 권위를 말해주는 일면이다.

그녀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여러 정치인들의 정책브레인도 지냈지만 명문 조지타운대학 국제정치학 교수도 역임한 바 있다.

그때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할게 있으면 손들 필요없다.

끼어들라" 고 가르쳤다.

그리고 유엔대사 시절 이를 실천했다.

남보다 먼저 말하고 자주 발언했다.

자신이 최강국 미국을 대표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과시했다.

그녀는 비외교적 언사도 사양하지 않는다.

북한의 유엔대표 부대사도 그녀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

영변 핵발전소 건설문제가 유엔안보리에서 논란이 됐던 때였다.

북한측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고 미국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장시간 늘어놓았다.

올브라이트의 대응은 경멸조의 단 두마디였다.

"낡은 냉전시대 연설 덕분에 40년은 젊어진 느낌이다.

발언에 감사한다.

" 지금 그녀는 워싱턴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다.

언론의 성원도 대단하다.

올브라이트라고 해서 새로운 외교정책을 들고 나왔다거나 뚜렷한 성과를 올린 것은 아직 없다.

그러면서도 전임자들에 비해 훨씬 우월한 여론의 지지를 누리는 것이다.

그 순항의 비결은 대외적인 것에 앞서 대내관계가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올브라이트는 대외정책을 맡고 있는 관리답지 않게 국내 여행이 잦다.

장관에 임명되자마자 텍사스주의 휴스턴을 방문,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를 만났다.

그뒤 미시간주의 그랜드 래피즈를 찾아가 전대통령 제럴드 포드와 대화를 나눴다.

화학무기확산금지조약의 의회 통과를 위해 공화당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상원 외교위원장 제시 헬름스의 지역구 노스캐롤라이나주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녀의 '내교 (內交)' 는 반대당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다.

외교팀간의 협조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클린턴 2기의 외교안보팀은 흔히 ABC로 호칭된다.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를 비롯해 백악관 안보보좌관 새뮤얼 버거,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등 3인 성 (姓) 의 머리글자를 말하는 것이다.

ABC를 위시해 중앙정보국 (CIA) 국장.합참의장이 백악관 지하에 있는 상황실에서 통칭 주요관계관위원회 (Principals Committee) 를 열어 핵심 안보외교 문제를 협의한다.

이중 ABC 3인은 정기적으로 점심.저녁을 함께 한다.

특히 버거와 올브라이트가 다져나가는 협조관계는 괄목할만하다.

올브라이트가 외교정책의 대변인이라면 버거는 조정자다.

역할분담이 확연하다.

버거가 곧 워싱턴에서 열릴 미.중 정상회담 준비를 지휘하는 등 아시아통 (通) 이라면 올브라이트는 유럽에 숙달돼 있다.

통상문제 전문 변호사 출신인 버거는 외교전문가는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조직이 원활히 작동하는데 탁월한 조정능력을 갖추고 있다.

버거와 올브라이트가 팀을 이룬 후 첫 작업이 두 사람간의 직통전화 설치였다.

두 사람은 매일 십여차례 통화한다.

이들이 최대 역점을 두는 일은 의회.언론을 비롯해 모든 미국민이 외교정책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이며 그점에서 이들은 성공적이다.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자동차협상의 후일담이 흘러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미측의 슈퍼 301조 지정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것이 실패한 원인중엔 우리 부처간 합의가 충분치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대외정책을 맡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외적 권위다.

권위는 전문성에서만 나오는게 아니다.

관련 부처들과의 충분한 조정과 합의가 그 밑받침이다.

관련부처 합의와 여론 지원이 바탕을 이룬 외교가 점점 긴요해지는 시기다.

한남규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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