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62. 남이 하니 나도 하는 '삭발 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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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뭔가 안 풀리는 가운데 팀이 연달아 진다. 곧바로 팀 분위기가 나빠진다. 그 다음날 또 진다. 팽팽한 위기의식이 팀 전체를 감싼다. 그 다음날, 애처롭게 따라붙어봤는데 또 진다. 이쯤 되면 전체 선수단에 말이 없어진다. 분위기가 험악하다 싶을 정도로 가라앉는다. 연패는 불안과 침묵의 눈덩어리다.

이때쯤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있다. '삭발(削髮)'이다. 분위기 전환의 의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 둘씩 머리를 짧게 깎는다. 불교에서는 머리칼을 '세속적인 욕망의 상징'으로 본다. 그래서 삭발은 세속에서 벗어나 구도의 대열에 들어선 출가자 정신의 상징이다. 야구선수들이 삭발을 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단절시키고 '야구를 향한 진정한 구도자가 되겠다'는 뜻일 것이다.

운동선수가 삭발을 하면 곧바로 뒤에 두 글자가 따라붙는다. '투혼'이다. 그냥 삭발이 아니라 '삭발투혼'이 된다. 승리를 향한 진지하고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인정받는다.

올 시즌 삭발 투혼이 유난히 많다. 5월 중순 10연패에 빠졌던 삼성이 그랬고, 최근 부진에 빠진 기아가 그렇다. 될 듯 될 듯 안 풀리는 롯데에도 눈에 띄고, 지난해 2위에서 올해 성적이 곤두박질한 SK에도 주요선수 몇 명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일부 구단에서는 구단 직원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했다.

지난주 만난 한 구단 관계자에게 짧아진 머리카락에 대해 말했더니 "아니 팀이 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야지요"라고 농담 섞어 대답했다.

한화 유승안 감독은 "팀 막내 김창훈에게 주의를 줬더니 곧바로 그 다음날 짧게 자르고 왔다. 그런데 대놓고 말을 하지도 않은 송창식(김창훈과 동기)도 지레 겁을 먹었는지 삭발을 하고 왔더라"며 유행처럼 번진 삭발 열기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삭발에 대해 왈가왈부하자는 게 아니다. 심정적으로 강요된 삭발에 대해 "그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싶다. 선배가 자르면 후배는 알아서 잘라야 되고, 선수들이 머리카락까지 잘라가며 투혼을 불사르는데 구단 직원은 뭐 하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면 그건 진정한 프로와는 거리가 먼 획일적인 발상이다.

누가 하면 빚을 내서라도 해야 되고, 내가 뭔가를 했을 때 남이 동참하지 않으면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빗나간 '들쥐 신드롬'의 일종으로 삭발 유행이 번진다면 그건 구도(求道)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잖은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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