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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신포사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주기 위해 신포에 가있는 우리 근로자들이 4~5일간 행동의 제약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지난 9월30일 김정일 (金正日) 사진이 실린 노동신문이 우리 근로자 숙소 휴지통에서 발견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다음날 북측은 관련자 색출과 공식사과를 요구해 왔고, 2일부터는 공안요원들이 우리 근로자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나섰다.

이에 우리측은 북측의 조치에 항의하면서 공사의 정상화를 촉구하고, 아울러 8차 부지조사단 방북 (訪北) 보류 방침을 북측에 통보했다.

그 결과 중단됐던 경수로공사가 6일부터 일단 재개는 됐다.

지난 95년 가을 북에 쌀을 보내면서 '인공기 게양사건' '청진항 사진촬영사건' 등 곤욕을 치른 적이 있기 때문에 비록 영사보호및 특권면제 의정서가 있다고는 하지만 1백1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우리 근로자들이 북쪽에 가있는 상황에서 북측이 언제 무슨 트집을 잡아 무슨 생떼를 쓸지 사실은 걱정되고 있던 터에 이번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근로자들의 신변에 특별한 위해는 없었고 공사도 정상화됐기 때문에 일단은 안심이지만, 아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북측의 김정일사진 훼손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요구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북측의 입장에서는 10월10일 등극을 앞두고 한창 우상화되고 있는 지존 (至尊) 의 김정일을 남쪽 근로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대단한 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제3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북측은 깨달아야 한다.

관련자 색출이니 우리측의 사과니 하는 북측의 요구는 거두어 들여야 한다.

자기네들을 돕기 위해 와 있는 손님들을 한때나마 불안하게 만들었다는데 대해 오히려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로서는 북한의 요구가 억지에 불과하다고 버티는데서 그치고 말아야 하는가.

이와 비슷한 사건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 (他山之石) 으로 삼아 앞으로의 대비에 철저를 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핵동결 차원에서 경수로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는 핵동결과 함께 민족발전공동사업 차원에서 경수로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수십억달러의 경비를 부담하는 '봉' 이 됐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통일 이후 에너지분야에 투자해야 할 것을 미리 하는셈 칠 수도 있고, 남북공존을 유도하기 위한 대북지원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수로사업의 진정한 의의는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간에 신뢰와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첫번째 시범사업이라는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집행이사국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앞으로 8~9년 계속될 사업에서 북한의 자세를 다잡아 나가는 동시에 이러한 유의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앞으로 사업이 본격화되면 남북의 근로자들이 각각 최대 3천5백명씩, 도합 7천여명이 북적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이번 사건후 정부가 밝힌대로 경수로 인력들에게 상세한 행동지침을 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특권면제 의정서상의 신변안전보호조항들이 비상시에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북한과 실무협상을 통해 신변안전보장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아주 구체적인 절차적 내용을 양해각서 형식으로 합의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인력이 존중해야 할 북한 법규의 구체적인 내용과 범위, 신변안전보호와 관련된 북한측 의무의 구체적 내용, 영사보호 제공절차와 방법, 문제발생시 협의경로와 수단, 신체와 재산상의 손해배상 절차와 방법 등에 구체적으로 합의해야 한다.

도와주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먼저 성실하게 미리 대비하는 까닭은 첫번째 민족발전공동사업이 좌초되는 경우 장애를 조성한 북쪽보다는 통일 주도 책임이 있는 우리쪽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정세현 <민족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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