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밴드 이윤정 첫 앨범…전자音에 팝요소 가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스키장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글같은 이상한 안경을 쓰고 철사더미에 털실을 씌운 듯한 인조 머리칼을 나부끼며 삐삐밴드 전 싱어 이윤정 (21) 이 돌아왔다.

막 나온 그녀의 솔로데뷔음반 '진화' 에서 그녀는 가상세계에서 사는 사이보그인데 기계인 처지를 망각하고 자꾸만 뇌수가 늘어 지능이 높아가는 문제아다.

기계와 인간의 중간지대에서 방황하는 그녀는 기타나 드럼의 아름다운 소리와는 거리가 있는 컴퓨터의 '삑' '쉭' 소리에 둘러싸여 마치 사이렌 (그리스신화에서 뱃사람을 환각상태에 빠뜨려 죽게만드는 소리의 요정) 처럼 노래부른다.

이 음반은 가요사적으로 '진화' 까지는 아니지만 진화의 단초인 돌연변이는 될지 모른다.

국내에서는 희귀한 테크노음악으로 전트랙 (12곡) 을 채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류 대열에서 전곡을 테크노로 만든 음반은 나온 적이 없었다.

진보적 뮤지션들이 테크노를 화두로 들고 나왔지만 기존 가요와의 접목에 그쳤다.

테크노 음악은 컴퓨터와 각종 전자장비를 사용해 만드는 음악을 일컫는다.

DJ가 대부분인 연주자들은 그저 기계를 건드리며 어떤 리듬을 만드는데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테크노는 일반적인 화성 (하모니) 이나 멜로디가 없고 코드도 하나뿐인 음악이기 때문. 테크노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단순하고 리드미컬한 소절이 몇분씩이나 지속되는 일이 흔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초현실적인 기분에 빠지게 된다.

이 최면효과가 테크노의 맛이다.

또다른 맛은 컴퓨터 음향의 독특한 음색이다.

삐걱대는 전자음, 쿡쿡 찌르는 듯한 박자는 전자시대의 상징음이다.

달콤한 선율을 음악으로 알아온 기성세대에게 테크노는 생소할 뿐더러 종종 극단적인 음악이다.

그래서 음반업자들은 테크노를 일정한 형태가 없는 전자음악에서 팝적 요소를 갖춘 한결 대중적인 스타일로 탈바꿈해 내놓기 시작했다.

테크노 사운드에 멜로디를 가미하거나 주주클럽의 신보 '라니싸니싸파' 처럼 컴퓨터화된 드럼과 베이스에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형태 (박스기사 참조)가 그것이다.

이윤정 역시 테크노이면서도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 를 만들었다.

삐삐밴드 동료였던 강기영이 작곡한 '궤도' 는 음반중 멜로디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곡이다.

그밖의 수록곡은 기타음향과 컴퓨터로 추출한 드럼소리를 엮은 팝적인 테크노와 오직 기계음만 쓴 원형 테크노가 혼합돼 있다.

특히 미국유학생으로 테크노 감각이 수준급인 오세준이 작곡한 12번째 히든트랙은 무려 19분간 펼쳐지는 대곡으로 테크노의 '최면효과' 를 잘 보여준다.

'궤도' 를 TV무대에서 여러명의 백댄서를 배경으로 불러제끼는 이윤정의 모습은 또하나의 댄스가수처럼 보인다.

창법은 신선감과 작위적 느낌을 동시에 주었던 삐삐밴드 시절의 과장된 비음에 비해 숙성된 면모를 보이지만 힘이 좀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노래속 정서는 닳고닳은 댄스음악과는 다른 새로움이 있다.

머리속에서 막 끄집어낸 꿈을 쾌속냉동시켜 곧바로 듣는 사람에게 던지는 느낌이다.

물론 가요의 전통적 서사구조가 파괴된 이런 음악에 반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면에선 맞다.

테크노의 국내 성공여부는 미지수다.

미국에서 테크노 바람을 일으킨 영국그룹 프로디지와 케미컬 브라더스는 국내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한참 유행하던 펑크물결을 타고 인기를 누리던 당신이 왜 테크노라는 모험적 장르를 택했느냐" 는 질문에 "당신은 3년전 입던 옷을 지금도 입고 있느냐" 는 이윤정의 반문은 테크노세대의 정서를 보여준다.

글 = 강찬호 기자사진 = 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