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9. 농구선수가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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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배재중 농구부 시절의 필자(앞줄 맨 오른쪽)와 이희주 코치(뒷줄 맨 오른쪽).

1953년 서울 환도(還都) 후 배재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피란갔던 대구에서 서울로 돌아온 나는 배재고 2학년 과정을 밟게 됐다. 배재중 3학년 때 터진 한국전쟁으로 3년여 동안 공부도, 운동도 제대로 못한 채 고교 2년생이 된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학교 농구코트 앞을 지나다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중학시절 축구부에서도 쫓겨난 단신이었던 나는 감히 농구를 하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만은 예외였다.

"나도 좀 같이 하자"며 교복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코트에 들어섰다. 안경을 쓴, 키 큰 친구가 "농구해본 적 있니?"라고 물었다.

"농구? 아니, 해본 적 없어. 하지만 붙여만 주면…."

"그럼 곤란한데"하더니 다른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 친구가 농구부에 들어오겠다는데 어떡하지?"

저희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그 키 큰 친구가 "붙여주자"며 결론을 내려줬다. 그 고마운 친구는 바로 연용모(극작가)였다. 우리는 코치도 없이 선배의 지도로 매일 연습에 열중했다. 그리고 나도 배재고 마크가 선명한 농구부 유니폼을 받았다.

러닝셔츠에 싸구려 물감을 들인 초라한 유니폼이었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었다. 나는 농구부 유니폼을 보물처럼 책가방에 모시고(?) 다녔다. 매일 농구 연습에 열중하다보니 자연히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부르시더니 "너 요즘 무슨 운동 하냐"고 물었다. 나는 모기 울음소리만한 목소리로 "농구요"라고 대답했다. "너 이게 몇 번째냐. 이제 운동은 싹 집어치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가 질렸지만 "농구만은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시간에 공부나 더 해"라며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소중한 유니폼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이후 나는 유니폼을 집에 갖고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운동이 끝나면 동료인 김준규(재미 사업가)의 집에 맡기고 다녔다.

코치도 없이 연습한 지 한달이 지났을까. 서울시 춘계 고교농구 리그전이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다. 드디어 학교대표로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첫 상대는 경동고였다. 코트에 서니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어쩌다 공을 잡으면 우리 선수는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패스를 못하고 드리블만 하다보니 공이 제멋대로 튕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진땀이 흘렀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게 공이 날아왔다. 나는 기우뚱하며 공을 잡은 뒤 상대팀 골대를 향해 드리블했다. 다행히 가로막는 선수가 없었다. 노마크 찬스! 나는 멋진 폼을 상상하면서 골밑을 박차고 오르며 레이업 슛을 날렸다. 하지만 공은 림도 맞지 않은 채 빗나갔다. 함성과 폭소가 터졌다.

"임마. 정신차려. 우리 골대에 슛을 하면 어떡해!"

동료 선수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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