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외부의 머리를 빌려라 … 돈 되는 ‘열린 R&D’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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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미국 P&G그룹은 연구개발(R&D) 때 외부 인력을 활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기술 혁신)’ 전략을 쓰고 있다. 획기적 제품을 개발하고 연구 인력을 모두 고용하는 데서 오는 경영 부담도 덜고자 하는 것이다. 7500명의 내부 연구 인력을 지닌 이 회사는 150만 명의 외부 인력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고 자랑이다.

이 회사는 어떤 제품을 개발하다 막힐 때는 기획 의도를 담은 ‘기술요약서’를 외부 네트워크에 공개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모든 직원이 R&D 프로젝트 추진 때 활용 가능한 외부 기술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의무다. 이 같은 노력으로 제품의 35%, 개발 계획의 45%가 외부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이로 인한 R&D 생산성이 60% 증가했으며 순이익은 2001년 29억 달러에서 2006년 87억 달러로 급증했다.

국내 R&D 인력은 20만 명을 밑돈다. 이는 전 세계 기준으로 3%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지구촌에 널린 97% 연구 인력의 활용을 생각해 볼 때다. 미 기술 중개 전문 회사인 나인시그마의 스킵 데이비스 부사장은 “기업들이 지식재산권을 다른 기업에 개방하면서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오픈 이노베이션은 경제위기 상황의 가장 효율적인 투자 전략”이라며 “경제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지금이 바로 새로운 상품과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강조했다.

주요 선진국은 이미 글로벌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해 ‘폐쇄형 R&D’에서 ‘개방형 R&D’로 기술혁신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기술을 서로 공유하고 개방해 신기술을 창조하려는 전략이다.

국내 기업들은 개방형 기술혁신의 필요성을 공감하나 아직은 도입 단계에 머물고 있다. 불경기 속 세계 산업계에 ‘오픈 이노베이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식경제부와 한국산업기술재단·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 주최로 지난달 국내에서 이와 관련한 첫 글로벌 포럼도 열렸다. 중앙일보 등이 후원한 포럼에선 기술혁신과 기업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주요 선진국의 개방형 혁신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재단이사장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위해 학문 간 벽을 트는 것이 중요하다”며 “각 대학의 공대에 공학교육 혁신센터를 50개 구축했다”고 밝혔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은 “글로벌 경영위기 상황에서 각국은 똑같은 정책과 산업 전략을 펼치고 있는 상황으로 ‘묻지마’ 재정투자 정책과 ‘묻지마’ 그린뉴딜 정책을 내놓고 있다”며 “세계의 산업 기류가 이제는 자원·에너지 전쟁에서 기술 전쟁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측된다”고 밝혔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신뢰’다=오픈 이노베이션이 제대로 성공하려면 참여 주최 간의 신뢰 확보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소기업들은 기술 개방으로 자사의 기술이나 경쟁력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또 우리 사회는 아직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

미 기술혁신 중개 회사인 이노센티브 존 프레드릭슨 부사장은 “개방형 혁신에서는 참여 주체 간의 신뢰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며 “지식재산권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 해결 방안이며 여기에 보상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술 경영컨설팅 회사인 테크노베이션파트너스 현재호 대표는 “참여 주체와 중개조직 내·외부 간 경쟁적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개방형 혁신을 잘 활용하려면 다른 업종에 대한 기술연구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 향후 아시아권의 R&D 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 컨설팅 업체인 이철원 날리지웍스 대표는 “기술혁신은 개인적 네트워크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며 “이를 위한 다른 업종과의 연계는 개방형 기술혁신의 핵심 모델”이라고 말했다. 리처드 애덤스 바텔 수석부사장은 “최근까지 전 세계 R&D 지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40% 정도였는데 2030년 20% 미만으로 줄어들 것이며 대신 아시아권의 R&D 투자가 급격하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영국 맨체스터대의 이언 마일스 교수는 “지식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로 핵심 역량 집중을 위한 아웃소싱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학·연·관 힘 모아야=최근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기업의 R&D뿐만 아니라 연구소·대학의 관련 투자도 위축시키고 있다. 개방형 기술혁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업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세밀한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유럽연합(EU)의 오픈 이노베이션 사이트 설립자인 빔 판하베르베커 하셀트대 교수는 “양질의 지식 생산과 공유,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전담하는 기관이 설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를 위해 신뢰 있는 지적재산권 보호 ▶선도적 분야에서의 경쟁 촉진 ▶정부의 주도적 역할 ▶특정 아이디어나 회사에 집중하지 말고 혁신을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정책 등을 꼽았다.

사쿠타 마사하루 일본종합연구소 전무는 “일본의 R&D 시스템은 1990년대까지는 미국과 서유럽을 따라가기 위한 벤치마킹”이었다며 “이후 연구개발을 민간 기업에만 맡겼더니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산·학·연 협동체계 형성이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R&D 투자에 있어서 민간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80%에 이르며 이는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10% 이상 높은 수치라고 밝혔다.

이화여대 박영일 교수는 “우리는 기술 이전과 연구 생산성, 인력의 이동에 대한 제약 요인이 상대적으로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개방형 기술혁신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봉석 기자

◆오픈 이노베이션=2003년 미 버클리대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제시한 이론. 연구개발의 전 과정을 한 기업이 모두 소유·운영하는 폐쇄형 혁신에 대비되는 말로 개방형 혁신을 말한다. 제품 아이디어와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안으로 열린 기술혁신’과 자체 기술을 스스로 사업화하지 않고 팔거나 분사하는 ‘밖으로 열린 기술혁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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