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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엮은 역작, 빛을 발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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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중이 잘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작업이지만 관련 분야에선 감초처럼 꼭 필요한 '기초자료 쌓기'에 매진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3~4년은 보통이고 길게는 10년이 넘게 걸리는 노작을 만들어내는 이들이다. 그들의 도전이 속속 빛을 발하고 있다.

최근 나온 것으로는 손승철(강원대 사학과.52) 교수의 '한일관계사료집성(전32권.경인문화사)'을 꼽을 수 있다.

한.일관계사학회 회장이기도 한 손 교수가 15년을 투자해 만든 '한.일 관계 2000년간의 사료집'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서 한.일 관계 기사 2만건을 발췌했다. 원문.번역문이 29권이고, 기사연표.색인집이 3권.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사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압도적이다.

손 교수는 "한.일 간 역사를 통관하면 '교류'보다는 '문화 전수'나 '침략'이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았으므로 '관계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면서 "일본의 한국 관련 사료가 정리되면 한.일 관계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정성(경남대 화학과.63) 교수가 정규중(63)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펴낸 '과학기술 연대기'(경남대 출판부)도 주목할 만하다.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발명품을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연대 순으로 정리했다. 3년간 이 책을 준비했다는 양 교수는 "과학기술 발전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초등학교에서 노인까지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인데도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선뜻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올 초에 나온 '세계사 연대기'(박영재.최갑수 감수, 박은봉 외 5인 엮음, 역민사) 역시 연대 순으로 세계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최종수 역민사 대표는 "세계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연대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데 뜻을 같이한 5명이 5년간 힘을 합쳐 만들어 냈다"고 밝혔다.

1950년대 인기 잡지 '학원'의 편집장을 지낸 원로 출판인 최덕교(79)씨가 최근 펴낸 '한국 잡지 백년'(전3권.현암사)도 주목받는 저작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을 바쳐 집대성한 한국 잡지 역사 100년의 증언이다.

국내에서 '나홀로 사전 만들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이는 박재연(선문대.중어중국학.48)교수다. 그는 10여년의 작업 끝에 '조선시대의 중국어 사전'이라 할 '중조대사전'(中朝大辭典.전9권.선문대 출판부)을 지지난해 출간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고어 사전'(이회문화사)도 펴낸 바 있는 박 교수가 이 같은 사전을 만들기 위해 번역.정리해 낸 조선시대의 중국 소설만 '삼국지 통속 연의' 등 44종. 다음달엔 '홍루몽'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기상(한국외국어대.철학)교수가 중심이 돼 편찬 중인 '우리말 철학사전'(현재 3권까지 나옴.지식산업사)도 '외롭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에 해당한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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