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서역에서 헤매다]3.둔황의밤,자아확대의 회한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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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렌(祈連)산맥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3천개나 되는 빙하 따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묵묵부답의 비장한 산세였다.

서역의 길은 그 산맥과의 평행이기도 하다. 어디에 찍 소리 하나 없어야 했다. 소리 없음이 만가지 소리의 근원인가.

황하(黃河)는 이름대로 누런 물이었다. 그 강물과 만나는 난저우(蘭州)에서부터 중국 외지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이 시작된다. 길이 1천2백㎞,너비 1백㎞.

마치 그렇게 구획된 듯한 사막이다.

그 사막은 아주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살아 있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유목민족의 명멸이 있고 오늘에도 11개 소수민족이 서로 다른 얼굴과 풍습을 가지고 분포되었다.

한번 바람이 불면 이제까지 있었던 것을 싹 쓸어 없애기 십상인 사막에는 그러나 이따금 오아시스의 행복이 있다.

광막한 회백색 사막에서 서럽도록 진한 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오아시스의 나무들과 채소밭이야말로 거기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꿈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사막은 더없는 청정(淸淨)의 세계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던가.

과연 그곳의 도처에는 어떤 생명체가 죽어도 그것을 아주 청정한 미이라로 만들어 생명의 형해(形骸)로 남기는 것이었다.

그런 미이라와는 달리 서역으로 들어갈수록 모래로 만든 무덤들이 보였다.

지금의 중국에서는 무덤을 쓸 수 없다. 광대한 땅에도 불구하고 13억인구가 살아갈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족(漢族)서민들은 논과 논 사이의 논두렁을 깊이 파고 거기에 시신을 세워서 암매장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는 출산도 1부모 1자녀로 제한되었다.

다만 농촌에서는 노동력 때문에 2자녀까지 눈감아 주는 경우가 있다.

한족과는 달리 중국 전체 56개 소수민족에게는 산아제한이 없다. 중국의 자신만만한 민족정책이기도 하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이 끝나는 요새이다.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 6천3백50㎞ 장성이 그 대단원을 이룬 것이다.

지렌산맥이 만년설을 이고 있는 원경으로 사막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 요새의 내성 외성 옹성(瓮城)으로 된 천하웅관(天下雄關)이 방금 불어닥친 모래폭풍에 한동안 그 자취도 없어진다.

떠나야 한다. 여기에 이르러 삶의 어떤 성취도 패배에 다름 아닌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저 떠나는 수 밖에 없다. 길은 그런 구제(救濟)였다.

옛 사주(沙州)인 둔황(敦煌)을 향해 떠났다. 이름 그대로 번영을 누리던 그 오아시스 도시는 푸른 목화밭으로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한 공안원이 피의자를 연행하는데 피의자의 두 손 엄지손가락에 아주 작은 손가락 수갑을 채운 것이 인상적이었다.

‘인민으로부터 배우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한다(學人民 愛人民 爲人民)’라는 중국공산당의 구호는 이런 사막에서도 낡은 현수막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둔황. 여기에 와서 마침내 지렌산맥은 그 서쪽의 욕망을 끝냈다.

그래서 끝없는 사막을 열어 지난날의 카라반이 아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실크로드를 이어준다. 사막의 대낮은 너무나 뜨거우므로 밤의 길이 진짜 실크로드이기도 했다.

이 한·당대 서역의 요충지에서 하룻밤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막고굴 천불동으로 달려갔다.

아주 작은 오아시스였다. 팔매질할 돌맹이 하나 없는 순 모래뿐인 그곳에 전생의 처녀같은 월아천(月牙泉)물이 반달처럼 담겨 있다니. ‘물이 있어야 인생이 있다’라는 사막학(沙漠學)의 한 발언이 여기 와서 딱 들어맞는다.

명사산(鳴沙山)은 모래가 우는 산이다. 모래로만 이루어진 산이다.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면 그 모래는 몸에 스미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며든다.

그 유려한 모래 언덕이 가파롭게 이어지는 저쪽으로 천년동안 만들어지고 천년동안 숨겨졌던 막고굴이 나타난다.

무려 4~14세기 사이의 세월을 바쳐 굴을 판 것이 1천개이상 발굴되었다. 그래서 천불동이겠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석굴은 4백92개. 그안에 2천2백여 소상(塑像)과 수많은 천정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많은 도굴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의 화랑이다.

인도 서북부 간다라미술과 중국의 민속예술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서역미술의 독창성이 성립된 것인데 그 숙달된 선과 색채의 무아경은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이 막고굴 벽화 가운데서 어찌 비천상(飛天像)을 말하지 않겠는가.

옳거니,둔황의 상징은 비천이다.

비천은 불교에서 스스로 지위가 낮은 공양보살이다. 향음신(香音神)이다. 향과 꽃을 뿌리며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정토의 천녀(天女)를 말한다.

천궁(天宮) 십보산(十寶山)에 머물며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꽃을 모아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이다.

실로 아름다운 천녀의 그 우아한 자태는 아름다움의 극도에 닿아있는지 모른다.

이집트·인도에서 시작한 이래 멀리 한국의 불화와 범종(梵鐘)에도 그것은 그려져서 날고 있는 것이다.

막고굴의 기원은 4세기 무렵 한 승려의 환상 가운데서 몇천의 불상이 빛에 싸여 나타난 이곳을 성지로 삼아 석굴을 파기 시작한 데 있다.

사실인즉 대륙 각지의 이같은 대규모 석굴은 반농반목의 인종들이 암굴이나 토굴의 주거생활을 한 혈거시대의 발전인 것이다.

지금도 간쑤성 일대의 산중 촌락에는 그런 주거공간으로서의 암굴과 토굴이 적지 않다.

하서회랑은 많은 특산물이 있다. 신장위그르 우르무치와 돌판에서까지도 거래되는 포도는 예로부터 이름난 포도주를 빚어냈다.

그 백포도주를 지렌산맥의 흑옥(黑玉)으로 만든 야광배(夜光杯)로 마시는 취흥은 옛 시 양주사(凉州詞)에도 나오지 않던가.

그런 야광배의 포도주를 말을 탄채 마시며 멀리 전선으로 떠나는 장군의 감회를 잘도 알아차린 말이 발을 굴러 한번 울어대는 것이었다.

말이야 날아가는 제비도 밟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산단마(山丹馬)였다. 천마(天馬)가 그것이다.

이제 둔황의 사막 위에 보름달이 떴다.

이 사막의 하룻밤은 인간이 자기자신들의 것에만 길들여지고 있는 한 뭔가 커다란 상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체제의 단위로 삼고 있다. 그 체제의 한계 안에서 현실을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은 것의 총화가 아니라 아직 가지지 못한 것,혹은 앞으로 가질지도 모르는 것의 총화라는 한 실존철학자의 말은 현실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까지 찾아가지 못한 모든 세계에 대한 회한은 나에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기도 하다.

사막의 밤은 자주 목이 말랐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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