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고구려] 上. 벽화, 고구려발 타임머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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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8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앞두고 북한이 고구려 벽화고분 일부를 중앙일보와 MBC에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벽화고분은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소재 세칭 '덕흥리고분'과 인근 삼묘리에 있는 '강서대묘''강서중묘', 그리고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진파리 1호분'등 네 곳이다. 특히 이 가운데 '진파리 1호분'에 대해 북측이 한국 언론에 공개 및 사진촬영을 허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 고구려 벽화고분 중 이번에 공개된 것은 불과 네 곳밖에 안 되지만 벽화를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흥분과 감동이었다. 천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아! 고구려'에 취재진은 내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 진파리 1호분=북측이 "발굴 이후 30년 만에 최초"라며 그동안 진흙과 벽돌로 봉쇄했던 입구를 뜯어내자 무덤 안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암냉(暗冷)과 함께 고구려 조상들의 숨결이 후-욱 온 몸에 느껴졌다. 촬영용 조명을 타고 맨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무덤 안길의 동.서벽에 각각 자리잡은 문지기. 발견 당시 도굴 구멍을 통해 진흙이 쏟아지면서 훼손돼 거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을 부릅뜬 채 두가닥 창을 들고 마주선 자세가 누구라도 주인에게 손 하나 까딱하면 그냥 두지않을 기상이다. 무덤칸 안으로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물빛이 비치고 바닥엔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벽화 부스러기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사방 벽과 천장에 희끗희끗 드러난 상처들의 딱지다. 벽면을 곱게 미장하고 회반죽을 입힌 뒤 그림을 그린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6세기의 이 걸작이 '폭삭 '하지 않고 오늘이 있음이 얼마나 고마우냐. 묘실이 남향이니 북벽이 주벽인데 사신총(四神塚)답게 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다. 손상된 부분이 많아 현무의 모습 중 거북의 왼쪽 뒷다리와 등껍질 일부만 선명하게 보일 뿐 머리 부분과 거북을 휘감고 있는 뱀의 형상은 흔적만 보인다.

다른 사신도 무덤과 달리 현무를 가운데 두고 좌우 대칭적인 자리에 각각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는데 현대화 수법이 읽히는 자태가 자못 영험스럽다. 소나무와 현무 사이, 그리고 윗 부분 등에 바람에 날리는 구름무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고구려 들판으로 내몰고, 오른쪽 소나무에는 거세게 휘날리는 구름을 타고 한마리 용이 승천하면서 복토(福土)임을 가리키고 있다.

동벽의 청룡, 서벽의 백호도 보존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늠름한 기상은 살아 있다. 특히 다른 무덤의 사신도와 달리 용호가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게 특색인데 청룡의 꼬리 위쪽에 그려진 한마리의 나는 새가 매우 생동감을 준다. 남벽 입구 좌우의 주작도 그런 대로 날렵하고 천장의 해(동쪽)와 달(서쪽)엔 각각 삼족오(三足烏)와 옥토끼.두꺼비가 전설을 일러주고 있다.

◆ 덕흥리 벽화고분=잘 알려진 대로 지금까지 발견된 90여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안악3호분과 함께 고구려의 문화와 생활풍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보물창고다. 특히 벽화에 있는 묵서(墨書) 묘지명(墓地銘)을 통해 무덤 축조 및 벽화를 그린 시기를 알 수 있어 벽화고분의 연대 가르기 기준이 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976년 인근 옥수수 밭 등에 물을 대기 위한 물탱크를 만들려다 우연히 발견된 이 무덤은 당시 봉분도 없는 상태로 도굴꾼에 의해 천장 뚜껑이 열려 있던 탓에 무덤 안이 온통 진흙과 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북측 관계자의 설명에다 이미 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모사도(발굴 당시 제작)를 본 터라 답사라야 그저 실물을 직접 본다는 의미 정도로만 생각했다. 30년이 다 돼가는 마당에 더 망가졌으리란 막연한 생각에서. 하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선 순간 확인되는 생각의 얄팍함이라니…. 묘지명에 따르면 영락(永樂) 18년(서기 408년)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묘실의 문을 닫았으니 거의 16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히려 모사도는 물론 사진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림, 그림들. 현대과학으로도 아직까지 안료의 정확한 성분조차 분석해 내지 못하는 판에 조상들의 지혜를 한 순간이나마 가볍게 본 듯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외부의 빛과 바람의 직접 접촉을 막기 위해 지하로 'ㄷ '자 모양으로 돌림한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앞칸 북벽에 휘장을 친 평상 위에 앉은 주인공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근엄한 표정으로 후손을 맞는다. 보호유리벽을 통해서지만 좌우에 시종을 거느리고 서벽에 그려진 13명의 태수에게서 하례 받는 장면이 생생하다. 태수들 중 밑에 그려진 일부의 모습이 크게 훼손됐지만 주인공과 나머지 인물은 얼굴과 수염 등의 선이 방금 그린 듯 선명하다. 주인공 오른쪽 위 천장 부분에 쓰인 묘지명도 대부분 읽을 수 있고, 북두칠성과 견우직녀의 만남도 그럴싸하다. 안칸과 연결된 통로 동벽엔 주인공 부인의 수레를 끌고가는 황소의 콧김이 느껴지고, 안칸 서벽에선 2인1조의 마상 활쏘기 대회가 한창이다. 앞칸과 안칸, 사이 길의 벽과 천장 어디를 둘러봐도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 행렬.사냥.연못.마구간.창고.은하수.나무.말 등등. 생전의 생활풍속과 천상세계가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구려에 와 있는 기분이다. 몇번을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질리지 않는다. 고구려의 위대함이자 힘이다.

◆ 강서대묘.중묘=세 무덤 중 대묘와 중묘에만 사신도(四神圖)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대묘는 규모나 천장에 황룡이 있는 점으로 미뤄 590년에 사망한 평원왕의 무덤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중묘는 그의 아들 양원왕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 무덤 모두 벽면에 장식무늬 없이 사신도만 그려진 것이 특색이다. 질이 좋은 화강암을 잘 갈아서 무덤칸을 만들고 그 위에 벽화를 직접 그린 것도 공통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대묘의 청룡과 중묘의 백호. 그동안 여러차례 사진을 보았지만 막상 대묘의 청룡을 보니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아가리를 벌린 채 대지를 박차고 곧장 승천할 듯한 위풍당당함에 절로 뒷걸음 쳐진다. 몸뚱이 비늘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칠한 오색(五色)이 선연하고, 짜인 구도와 속도감 있는 필치가 웅건하며 호탕하기 그지없다. 중묘의 백호 역시 둥글고 큰 눈에다 넓고 큰 머리로 남쪽으로 내닫는 날렵한 기상이 기운생동 그 자체다. 두 무덤 모두 청룡과 백호가 강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무와 주작은 신비롭고 유연한 편이나 짜임새나 질감 등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 천장의 그림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묘에 그려진 비천(飛天)의 경우 선약이 담긴 그릇을 들고 연보랏빛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피리를 불고 날고 있는데, 피리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바람결이 느껴진다. 흔적만 남아 있는 대묘의 백호도 전체적인 회화수준으로 보아 걸작이었음에 틀림없을진대 일제가 안료 연구를 한답시고 긁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 게 북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통탄스러울 뿐이다.

평양=이만훈 전문기자 <mhlee@joongang.co.kr>


소수레 타고 납시오
북한 국보 유적 제156호인 덕흥리 벽화무덤은 인물 풍속도를 그린 '유주자사' 진의 두방무덤이다. 앞칸과 안칸의 사이 길 동벽 윗단을 수놓은 벽화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나들이 나선 무덤 주인과 남녀 시종을 묘사하고 있다. 색동 주름치마에 긴 저고리를 입고 마차 뒤를 따르는 여성들이 눈길을 끈다. 평양=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강서대묘 청룡
북한 국보 유적 제28호인 강서큰무덤은 안칸 북벽의 현무 등 네 면을 장식한 사신도로 유명하다. 안칸 동벽에 그려진 청룡의 살아 꿈틀거리는 듯 날아오르는 모습이 고구려인의 기상을 짐작하게 한다.


문 여는 진파리 1호분
1974년 발굴 작업을 끝낸 뒤 진흙으로 봉한 채 엄격하게 출입을 제한해 온 진파리 1호 무덤이 30년 만에 한국 언론에 문을 열었다.


한국 그림 속 첫 소나무
진파리 1호분 안칸 북벽에 솟아난 소나무는 배경이 아닌 풍경 그 자체로 독립한 한국 회화사 속의 첫 나무로 기록할 만하다.


연꽃 무늬 천장
두둥실 하늘로 떠가듯 역동적인 구름 무늬와 아름다운 연꽃 문양에 취한 한국 취재단이 진파리 1호분을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에서 둘째,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최종택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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