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벌 유적을 통해 유추해 본 당시 생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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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광주비엔날레 (11월27일까지)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놓쳐서는 안될 곳이 한군데 있다.

2천년동안 드리워진 베일을 걷고 삼한시대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신창리 유적지가 그곳.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운행중인 무료셔틀버스 제3노선에 코스로 들어 있다.

김병모 (金秉模.한양대.고고학) 교수가 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가야금.베.베틀부품 등을 바탕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2천년전 신창벌 어느 목수 (木手) 의 일상을 복원했다.

신창벌은 강변에 있어서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잘 자랐다.

벼농사도 이미 수백년 해온 터라 날씨만 좋으면 많은 양의 벼가 수확되었다.

원주민들은 농사꾼들이었다.

우물을 팠고 집은 비록 땅을 파고 만든 반움집이었지만 간혹 족장들의 회의가 열리면 베옷일망정 두건을 쓰고 참가하였다.

공사 (公事) 를 주제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회의가 끝나면 술을 마시는데 한 술잔으로 여럿이 돌려가며 마셨다 (行觴풍속) . 이런 사회에 하나 둘 타지 (他地)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아마 낙랑땅 사람들이었던 모양으로, 원주민들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복장에 이상한 구리 조각을 돈 (화폐) 이라면서 물건과 바꾸자고 하였다.

이주민들은 머리를 위로 빗어 북상투를 틀었고 유리.구슬.목걸이에 허리에 칼을 찬 자도 있었다.

지체가 조금 높아 보이는 사람은 칼집이 검은 칠로 번쩍거렸고 손잡이에도 구리로 장식을 매달았다 (靑銅劍把頭飾) . 이주자들의 수가 늘고 그 세력이 커지자 원주민들이 오히려 주눅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굴러든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이주자들의 생활이 원주민보다 윤택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주자들 중에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수.도공.대장쟁이 등 기술자가 많았다.

신창벌 사람들도 신기술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때 풍속은 5월과 10월에 한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큰 잔치를 앞두고 몇가지 가구와 방직기계인 베틀을 만들어 달라고 목수에게 주문해 온 어떤 대가 (大加, 부족장격 인물) 는 북과 바디 (緯打具)에다 사치스러운 칠 (漆) 까지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목수의 공방은 원두막처럼 생긴 집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집 아래에다 돼지를 기르지만 목수는 돼지 대신 통나무를 물에 담가 놓았다.

그래서 목수네 집은 기둥 몇 개가 개울물 속에 서 있는 수상 가옥이다.

그동안 틈틈이 만들어 둔 농기구들과 나무그릇인 함지박, 목두 (木豆 : 제사용 그릇) , 뒤주같은 것들을 사러 오는 농사꾼들에게 많은 양의 벼를 받고 팔아 목수네 곳간은 볏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주자들은 신창벌 원주민들과 그렁저렁 어울려 살게 되었지만 몇 가지 근심이 생겼다.

이주자들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 세력이 커지는 것은 좋으나 기술자의 수가 늘어나 희귀해서 비싸게 팔리던 공예품들의 값이 덤핑 가격으로 떨어져 웬만한 사람이면 집에다 고급 가구 하나씩은 들여 놓았고 구슬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게 유행이 되었다.

또 한가지 근심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돌림병에 수없이 쓰러져 신음하는 것이다.

원주민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는데 타지 출신의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왠지 병약 (病弱) 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원인모를 병에 죽어 나갔다.

뒷 산에는 아예 아이들의 공동묘지가 생겼다.

죽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비싼 나무 관을 만들어 쓸 수가 없었으므로 집에서 쓰던 옹기 독에다 넣어 양지바른 언덕에 가지런히 묻었다 (甕棺) .원주민들의 고인돌 전통과는 다른 풍속이었다.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마을 굿을 하게 되었다.

굿에 쓰기 위해서 악사 (樂士)가 특별히 주문한 가얏고 (絃樂器) 를 반쯤 만들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며칠을 두고 쏟아졌다.

강물이 불어나 공방까지 물이 차 올랐다.

목수네 가족들은 허겁지겁 창고로 달려가 아까운 쌀 섬들을 건지려 하였으나 이미 물에 쓸려 내려가고 없었다.

목수의 공방도 물살에 쓸려 넘어져 버렸다.

산사태가 나서 일순간에 신창벌은 흙에 덮혀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의 모습이 최근 2천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병모〈한양대 고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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