냠여 공존의 시대,'역할파괴' 대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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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4년 앞으로 닥친 21세기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가장 지배적인 전망중의 하나는 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나리라는 것. 20세기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차이에 의해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했던 기간이라면 21세기엔 그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남녀가 책임도 권리도 동등하게 나눠가져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

'남녀공존의 시대' 로 가는 길목, 변화의 흐름을 짚어봤다.

"아빠는 왜 남잔데 청소를 해?"

"엄마는 여자면서 왜 신문을 봐?"

회사원 김모 (34) 씨는 유치원생인 두 딸에게 한번도 "여자가…, 남자가…"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의 한국은 은연중 '청소하는 여자' 와 '신문보는 남자' 라는 고정된 성역할을 아이들에게 입력해버린 것. 비록 아내는 전업주부 역할을 떠맡고 있지만 김씨는 자신의 딸들이 자랐을 땐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길 바란다.

"공들여 키운 딸들의 재능을 썩히지 않게 됐으면…" 하는 소박하고도 솔직한 희망사항이다.

김씨의 바램이 과연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을까. 다소 희망을 가져봐도 좋으리란 게 많은 이들의 예측이다.

4년 앞으로 다가선 21세기와 관련해 난무하는 갖가지 전망중엔 '세상의 절반' 인 여성들이 명실공히 절반의 몫을 다하게 되리라는 낙관론도 포함돼있다.

이른바 '3F의 시대 (Feminine.Feeling.Fiction)' - 여성적이고 감성적이며 가상이 지배하는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인류가 새롭게 발전해 나가기위해선 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

이수자 박사 (성신여대대학원 여성학과) 는 이미 변화의 징후가 곳곳에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정치분야만 해도 그렇다.

부패와 스캔들로 얼룩진 정치풍토에 식상한 유권자들은 꼼꼼히 삶의 질을 챙겨줄 '생활정치' 를 원하고 있다.

올해 치러진 영국과 프랑스의 총선이 좋은 예. 유럽통합이 주요 쟁점이긴 했지만 실업.사회복지.환경등 생활밀착형 이슈들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많은 유권자들이 이같은 생활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의원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게 최근 대다수 여론조사의 결과. 많은 여성의원을 공천했던 노동당과 사회당이 압승을 거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영국 노동당은 사상최대인 109명, 프랑스 사회당은 지난 총선의 열배에 달하는 40명의 여성의원을 배출했다.

백영옥교수 (명지대북한학과) 는 "부패의 '차단 고리' 가 된다는 점에서도 여성참여는 기존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고 말한다.

경제쪽은 어떨까. 갈수록 소프트화하고 서비스지향적이 되어가는 경제구조의 변화는 더 많은 여성인력을 산업현장으로 불러낼 수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육체적인 완력 대신 창의성과 감성이 차지하는 몫이 점점 커짐에따라 여성들의 비교우위가 높아지고 있는 것. 게다가 "남성위주의 기업문화보다는 이질적인 문화, 즉 남성적인 문화와 여성적인 문화가 맞부딛칠 때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보다 많은 기업들이 여성인력 활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 포스코경영연구소의 유한수소장은 말한다.

이처럼 사회에서 여성들의 몫이 커지고 있는 것은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남성과 동등해진 현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남녀의 대학진학률에 거의 차이가 없다.

고학력 여성들이 가정의 틀안에 머무르는 사실은 사회전체적으로 막대한 인적자원의 낭비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집안일 = 여자, 바깥일 = 남자' 라는 성역할의 고정관념 탓에 남성들 역시 과중한 부담으로 짓눌려 왔다는 인식이 최근들어 확산되는 추세다.

21세기의 주역이 될 우리 아이들은 이미 남자일.여자일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자란다.

남자아이들도 가정시간에 나박김치를 담그고 여자아이들은 기술시간에 휴즈 다루는 법을 배운다.

성에 따른 '차이' 는 있지만 일에 대한 '차별' 은 없는 사회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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