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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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내가 이 집의 미네르바인데 어째서 나에게 이 요정처럼 생긴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지 않는 거지?"

맥주를 예닐곱 병쯤 마셨을 때, 정마담이 특별 서비스라며 햄치즈 한 접시를 직접 들고왔다.

그리고는 이예린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은 걸 사뭇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풋,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녀의 불만을 되받아쳤다.

"지혜의 여신이 요즘은 노망이 들은 모양이야. 아직 남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속일 수 없지. "

공교롭게도 그때 서빙하는 아가씨가 다가와 내게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누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잘됐다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전화를 받고 올 동안은 자신이 요정아가씨를 대접해 주겠다며 능갈맞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즐거운가요, 지금?"

전화를 걸어올 사람이 달리 없으리란 생각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예상대로 오기욱이었다.

"나도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뭐하고 있냐?"

"나요?… 흐, 지금 보드카 마시고 있어요. 인생처럼 술맛 한번 진탕 쓰네요. " 취기 때문인가, 평상시의 나른함이 도발적인 객기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마시는 거야?"

"혼자 마시잖으면, 내게 누가 있겠어요? 형이 노는 계집이라도 하나 불러줄래요?"

은근히 노기를 품은 듯한 어조로 그는 이기죽거렸다.

"빌어먹을,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일루 기어내려와!"

"후, 기어내려 오라구요? 걸어가고 싶은데… 그 여자는 아직 있나요?"

"맙소사… 그래서 전화한 거냐?"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소 당황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럼요, 형 보다야 맘에 드는 여자가 우선이죠. 내가 내려가도 정말 괜찮겠어요?"

"내려와서 무슨 짓을 할 작정인데?"

그가 여자에 대해 기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맹목적인 저돌성과 파행성, 그리고 지난번의 가면무도회를 떠올리며 나는 은근히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동문서답.

"형,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됐어요. 내 영혼의 휴화산이 갑작스럽게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말이라구요. 그러니 잠시뒤면 '잃어버린 지평선' 도 뜨거운 용암으로 뒤덮일 거에요. 이 일을 어쩌죠?"

글=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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