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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경제위기 극복, 대학 역할 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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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통 분담을 함께 하자는 취지로 급여를 줄이고 고용을 유지·확대하도록 하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가 확산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수많은 실직자를 낸 뼈아픈 경험을 한 우리로서는 일자리를 늘린다는 긍정적 측면을 고려하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자리 나누기는 단기적 처방이며, 자칫 고용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임금 삭감만 이뤄지거나, 신입사원과 기존 사원 간의 불균형을 유발하는 경우 불황 극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 극복 이후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선 대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인력을 해고하지 않고 일정 기간 교육을 통해 인력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과, 장차 한국을 이끌어 갈 다음 세대에 대한 창의적 교육을 수행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학이 경제위기 극복에 공헌할 수 있다.

우선 고통 분담 차원에서 인재 양성을 위한 산-학-관의 협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직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당분간 대학이 흡수해 생산성을 높이고 신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대학과 기업 및 정부가 협력한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중소기업의 인재 양성을 위한 경비는 중앙과 지방정부가 중심이 돼 지원하고, 대학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한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인력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매몰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킬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고임금 인력으로 거듭날 경우 국민 소득과 세수 증대는 물론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결과를 얻는다. 미국이 경기부양 특별예산 7870억 달러 중 1000억 달러를 교육 분야에 배정한 것은 의미가 크다. 대기업도 인력감축 대신 1년 내지 2년의 교육 프로그램을 대학이 운영하도록 협력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 입장에서 인재 양성을 위한 경비 지출은 호황기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생산성을 높이며 기술혁신의 기반을 다지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 차원에선 대학 교육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창의적인 교육으로 변화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대학은 너도 나도 연구중심 대학으로 운영되다 보니 학부 교육을 소홀히 했다. 이젠 연구성과 못지않게 교육의 질을 높이고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나눌 스승이 필요하다. 한 대학의 학생 상담기관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의 30~40%가 상당한 심리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으며, 약 7%는 자해 또는 자살 충동을 지닌다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교수의 따뜻한 관심과 상담을 통해 현저하게 호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대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은 이뤄졌지만, 진정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지도자의 능력을 개발하는 교육에는 소홀했다. 우수한 연구성과를 낸 사람은 지상에서 널리 소개돼 학자로서의 명예가 높아졌지만, 대학에서 진정 학생을 사랑하고 창의적 교육을 실행하는 교수들을 명예롭게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대학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미래에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한국을 바르게 이끌어 갈 지도자나 인재가 배출돼 한국의 미래가 보장된다. 이는 교육을 위해 연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대학 본연의 의무는 교육과 연구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또한 기술혁신과 새로운 성장동력은 연구의 성과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만 이제 논문 편수를 늘리는 수적인 연구가 아니라 학문의 세계를 선도할 수준의 질적인 연구와 함께 창의적이며 학생과 교수가 소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삼옥 서울대 교수·경제지리학(서울대학교 평의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