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치매의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신의학자들은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가운데 하나인 '리어 왕' 의 주인공을 자식들 때문에 치매환자가 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고 있다.

80세에 이르러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결심한 리어 왕이 '사랑과 존경만이 자식된 의무' 임을 강조한 막내딸을 쫓아내고 아첨만 일삼는 맏딸과 둘째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리어 왕은 이때 이미 판단이 흐려지는 치매의 초기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물려준 뒤 약속대로 두딸네 집을 번갈아 오가며 살던 리어 왕이 번번이 박대를 당하자 분노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끝내 광인 (狂人) 이 되는 과정은 치매증세의 발전과정 그대로다.

몇해전 미국 샌디에이고의 한 정신의학자는 치매와 체중감소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목할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20년에 걸쳐 50~79세의 노인 2백99명을 관찰한 결과 치매에 걸린 60명의 노인중 남자의 58%, 여자의 48%가 최소한 4.5㎏의 체중이 줄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체중감소는 치매가 진전되기 몇년전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그 원인은 치매 초기단계에 후각기능의 상실로 인한 식욕감퇴 때문일 수도 있고,치매환자의 신진대사가 정상인보다 빨라 섭취한 음식물이 몸에 축적되지 않고 곧장 배출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체중감소가 정녕 치매의 원인일 수 있다면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곧 가족 사이에서 노인이 느끼는 소외감 (疏外感) 이다.

가족들이 리어 왕의 두딸처럼 겉으로는 신경을 쓰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귀찮은 존재' 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노인이 과연 정상적인 식욕을 가질 수 있을까. '세계 치매의 날' (21일) 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된 '성공적인 간호사례' 도 특효약은 '가족의 사랑' 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약물치료보다 심리적.환경적 치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만능으로 치닫는 세태에서는 26만명에 달하는 치매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다.

'리어 왕' 에서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소경이 되지만,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모두 효자가 된다" 는 궁중 광대의 독백은 우리사회에서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태가 서글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