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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8. 초동의 골목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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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어린 시절 필자의 단짝이었던 정운경 화백이 경기도 부천의 자유시장 입구에 있는 ‘왈순아지매’ 석상을 만져보고 있다.

나는 1936년 서울 중구 초동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김귀봉)는 음식점을 경영하셨고, 어머니(함성희)는 외아들인 나를 너무 사랑해주셨다. 부모님은 비교적 관대하셔서 나는 어느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활달하게 자랐다.

내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48년 4월 교동국민학교(현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에 입학하면서였다. 배재중은 미션스쿨로 미국의 선진 교육제도를 많이 채택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문예.성경.과학, 그리고 각종 스포츠 등 40여개의 과외 활동반을 운영하는 것이다. 학생은 반드시 이 가운데 한개를 선택, 가입해야 했다. 스포츠반이 학생들에게 인기 있었고, 나 역시 축구부를 지망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키 1m30㎝에 몸무게 43㎏의 꼬마였다. 축구공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선배 뒷바라지와 물주전자 심부름만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때문에 나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동네 골목에서 발산하곤 했다. 중앙일보에 '왈순아지매'를 연재했던 만화가 정운경은 어린시절 친구이자 초동 골목을 양분했던 라이벌 골목대장이었다. 우리는 남의 집 담장에 동네 미운 녀석들의 모습을 익살스럽고 흉하게 그리는 데 재미를 붙였다. 정 화백은 당시 그림에 상당한 소질을 보여주었다. 그림 솜씨는 그를 당할 수 없었다.

반면 나는 타고난 운동신경이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딱지.구슬치기는 기본이고, 그즈음 한창 재미를 들인 '축구공으로 여학생 엉덩이 맞히기' 장난에서 나는 가히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동네 어귀에서 축구공을 차 지나가는 예쁜 여학생의 엉덩이를 맞히는 게임이었는데 나는 10m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어김없이 목표물(?)을 명중시키곤 했다.

그러나 정운경이 찬 공은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는 "너는 운동선수가 되면 성공할 거야"라며 격려했고, 나 역시 "너는 화가가 딱 좋다. 좋은 그림 그려라"며 화답하곤 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재능은 학교 축구부에선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코치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지만 기어코 축구부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축구부 주장이 나를 운동장 구석으로 부르더니 "너 축구 꼭 해야겠니"하고 물었다. "네"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겐 축구가 맞지않는 것 같다. 키도 너무 작고 …"라며 축구부에서 나가라고 종용했다. 나는 두말없이 축구부를 그만뒀다.

그러나 스포츠에 대한 내 열정은 식지않았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2학년을 마칠 때까지 내가 들락거린 운동부는 탁구.육상.유도.역도.빙상부 등 여섯개나 됐다. 그렇지만 단 한군데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운동부를 순례하며 방황하는 새 학업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외아들인 내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던 부모님은 "저렇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들뜬 놈처럼 우왕좌왕하니 장차 뭐가 될 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셨다. "뭐든 한가지만이라도 잘하라"고 꾸중하시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3학년이 됐고, 그해 6월 한국전쟁이 터졌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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