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뺄셈 아닌 덧셈 정치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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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7대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에는 명암이 교차한다. 정치권의 기본구도가 정책경쟁 구도로 변화한 게 명(明)이라면, 경쟁의 구체적 콘텐츠가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 그 암(暗)이다. 소모적인 정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과거를 떠올리면 이런 구도 형성은 분명 민주화의 진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어떻게 풍부히 할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 정치구도가 정책경쟁 구도로 바뀐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본격적인 이념구도가 형성된 것이 그 첫째 이유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우리 정치 구도는 비로소 '보수-중도-진보'의 구도로 짜였고, 이 이념구도가 자연 정책경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책은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일종의 교량이다. 이 교량이 부실하면 결국 선거에서 패배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루가 다르게 요동하는 정당 지지율의 변화는 이를 입증한다.

세계화가 주는 충격은 또 하나의 이유다. 21세기 탈냉전 시대에 세계화는 개별 국가 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시장과 기업을 넘어 이제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

새로운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당은 지지층에서조차 외면받게 되며,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도 소비자인 국민의 권리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따라서 정당은 정책의 품질로 경쟁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이 좋은 제품, 다시 말해 많은 국민에게 설득력이 높고 지속가능한 정책 대안개발은 정당의 일차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정당에 이념과 정책은 상반된 게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망원경과 현미경이다. 정당은 이념을 통해 거시적인 방향을 탐색하는 동시에 주요 이슈에 대해 정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21세기의 정치에서 왕도(王道)란 없다. 보수.중도.진보적 대안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어떤 정책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가장 생산적이며 타당한가는 국민이 선택할 몫이다. 바로 여기에 정책 경쟁의 미덕이 있다.

문제는 이런 정책경쟁이 여전히 구체적인 콘텐츠를 그렇게 많이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정답이 없는 것은 정치가 갖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다. 이라크 파병,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에 대해 사실 모범답안은 없다. 대안에 따라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이 다르고, 정치적 효과와 경제적 효과가 다르다. 따라서 자신의 정책만이 진리라고 고집할 게 아니라 토론을 통해 적합한 정책대안을 도출해야 한다. 경쟁과 더불어 타협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경쟁이 콘텐츠를 갖추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정당은 정책 개발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의 정치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정책보다는 이미지가 더욱 중시된다. 하지만 정치의 본령은 전체 사회의 비전과 정책대안의 제시에 있다. 국민이 진정 갈망하는 것은 실속없는 '말의 잔치'가 아니라 내용과 비전을 갖춘 '프로그램의 경주'다.

둘째, 경쟁의 기술 또한 중요하다. 경쟁하는 이유는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서지, 파국으로 치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 우리 정치가 외면받았던 이유는 정책이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반대를 위한 반대'의 도구로 쓰였다는 데 있다. 타협할 것은 적극 타협하고 수용할 것은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대화와 타협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의 정치를 위한 경쟁의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17대 국회를 통해 민주화의 새로운 판이 벌어진 셈이다. 이 판은 무엇보다 건강한 경쟁과 타협에 의해 주도돼야 한다. 경쟁할 것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타협할 것은 합리적으로 타협하는 것, 이것이 '질 높은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