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열전] '산울림' 맏형 김창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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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창완 (43) 과 나는 이십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한 동네에 살고 있다.

내가 '산울림' 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중학교 1학년때가 76년 겨울. 그때 그의 집은 정금마을 (서울방배동 경문고 근처) 이었고 우리 집은 그 마을 건너 지금의 방배동 카페골목 근처의,가을이면 잠자리가 놀던 단독주택이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 그의 집은 방배중학교 뒤편에 있고 나도 방배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십년전 나는 길 하나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산울림' 의 맏형 김창완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마냥 재미있어 하던 중학생이었다.

지금 김창완은 그 중학생과 가끔씩 동트는 새벽까지 집 가까운 선술집에서 잔을 나누며 그와 함께 몸담고 있는 '음악동네' 이야기를 하곤 한다.운명처럼.

영화나 TV 드라마에 가끔 출연하기도 하고, 라디오 DJ를 보기도 하고, 생방송 아침 정보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는 김창완. 그를 보면 '문화 종합인' 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그는 미국 영화감독 우디 앨런을 연상시킨다.

적당히 숱이 빠진 봉두난발이 그렇고 닦지 않은 안경이 그렇다.

'차는 주인을 닮는다' 던가.

그가 지금 타고 다니는 차도 할부금 납부가 끝날 때까지 3년동안 세차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어느날 출근길 여의도의 한 사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주 토요일 내가 연출을 맡은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에 나올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라는 '산울림' 의 새노래를 듣고 가던 길. 주인을 닮은 씻지 않은 차는 노래에 빠져 있던 나를 두들겨 깨웠다.

운전석에는 특이하면서도 낯익은 머리모양이 보였다.

그에게는 '짝짝이 신발' 에 얽힌 일화가 있다.

97년 2월 13집 앨범 발간기념회겸 콘서트를 카페 프리버드에서 가졌다.

한창 기념식이 진행될 때 좌중 가운데 누군가가 "검정구두 왼쪽, 밤색구두 오른쪽, 왜 짝짝이로 신발을 신고 있느냐" 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김창완은 늘상 그렇듯이 해맑게 소년처럼 웃었다.

금년 7월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렸던 100회특집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 우리 생애 최고의 메가 콘서트' 에서 생긴 일 하나. '산울림' 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과 같은 출연자 대기실을 쓰고 있었는데 막 분장을 마친 창훈.창익 형제 외에 김창완은 머리에 핀으로 온갖 모양을 내고 있었고 목에는 어린 왕자의 목도리는 아니지만 미용실용 목덮개를 두르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미용실에 파마하러 간 어린 왕자를 떠오르게 했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를 부를 때에나 볼 수 있는, 바로 그 번개머리를 만드는 제작현장을 들켜버린 것이다.

많이 아물긴 했지만 그의 얼굴엔 상처자국이 있다.

한달쯤 전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다.

'개구쟁이' 라는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40이 넘어서 개구쟁이처럼 자전거를 타다 다쳤다.

사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과 하이킹을 가다 상처를 입었다.

거친 세상 어려운 줄 알고 크라는 뜻에서 고1때 미국 유학을 보낸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소문난 주당 (酒黨) 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김창완이 술마시자면 일단 조심하라. 집에 못 들어간다" 라는 '김창완 음주 경계경보' 를 퍼뜨린다.

한번 마시면 골목에 있는 선술집을 기필코 모두 순례한다는 그는 그룹 '동물원' 멤버들과는 며칠밤을 헤며 술을 마셨고 나와도 밤을 꼬박 새며 술을 마신다.

막상 그와 술잔을 나누면 이상하게도 마시면 마실수록 살아나고 더욱 거세지는 그의 기 (氣) 를 느낄 수 있다.

밤을 새우며 그가 세상에 만들어낸 노래들이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언뜻언뜻 담금질 잘된 강철같이 단단한 기개가 그 속에 꿈틀거렸던 비밀을 알 듯 했다.

가끔씩 그는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에도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술을 더 하자" 라고 말하며 그림같이 예쁜 집안으로 나를 들이밀려 한다.

아침 정보프로그램 생방송이 오전9시. 보통사람 같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잠을 자려 할 그 시각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음악적이다.

"더 마시고 가. "

어느 천둥치고 비가 억수같이 오던 밤. 그가 즐겨가는 간장 게장집에서 꽃게탕을 앞에 두고 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문학이죠, 내가하고 싶은 건.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음악이 아니라 문학이구요. 기타는 내게 타자기고 언어이지요. " 1977년 발표한 제1집 '아니 벌써' 부터 올해 발표한 제13집 '무지개' 까지 하나같이 '산울림' 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세계가 문학적 상상력의 음악적 울림이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 "지금껏 문학을 했다" 라고 잘라 말한 것은 그밤 내내 충격이었다.

80년대의 상업화된 록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되는 얼터너티브 록의 진정한 시작은 77년 발표된 '산울림 제1집' 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후 14년만에 팀을 재결성해 제13집 무지개' 를 발표할 때까지 일관되게 제1집부터 제13집까지 세상을 질주했고, 한국적 록음악이라는 소리와 분노 (Sound & Fury) 로 동시대 젊은이들의 정서적 해방구 역할을 '산울림' 은 거뜬히 수행해낸다.

그 3형제중 맏형 김창완. 그는 공상과학소설을 쓰고 있기도 하고 문득 "UFO를 믿어요" 라고 묻기도 한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고 거실로 기차타고 가자는 특별한 문학적 상상력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제13집 타이틀곡을 정하지 못하고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와 '무지개' 사이에서 갈등할 때 그는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갓 나온 밴드 같은 느낌을 주려면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가 훨씬 낫다.

노랫말도 문학적이다" 는 내 의견을 경청한 그는 언제나 넉넉한 철학자의 풍모를 갖고 있기도 하다.

내가 쓴 책의 머릿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갑작스레 받고도 흔쾌히 이를 수락한 김창완. 그 글을 쓰느라고 담배를 연신 피우고 밤 늦도록 고민한 끝에 멋진 글을 만들어 보낸, 시간이 흐를수록 잘 익는 게장같이 오래 겪을수록 인간미 넘치는 그. 문득 제주도 갔다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

흥우랑 술마시고 싶다" 고 했다던 김창완. 바쁜 방송준비 일정에 쫓기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뛰어 내려와 양식과 한식사이에서 망설이던 나에게 식탁에 앉아 "이쪽이야, 이쪽. " 하며 한식을 권하던 그의 순수한 인간적 매력. 그것이 바람부는 음악동네에서 그의 노래가 20년 세월동안 커다랗게 메아리치듯 음악 울림하던 바로 그 까닭일 것이다.

노래방에 가면 옛날 노래를 주로 부르고 노래를 부를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기가 살아나는 김창완.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의 대중가요와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 여러 시각에서 관심을 표현하고 "청소년들이 그들이 좋아하는 걸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것도 귀엽지 않나" 라는 열린 입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어린 왕자의 샛별같은 목도리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아저씨' 김창완. 그는 음악을 통해, 그리고 언어와 연기를 통해, 때로는 침묵과 두주불사 (斗酒不辭) 를 통해 대중문화를 사랑하고 가꾸어가는 '어린 왕자' 다.

이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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