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국, 對北 식량지원 제의 배경…4자회담 성사위한 고육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미 양국이 4자회담 예비회담에서 북한의 부족식량을 책임지겠다고 제의한 것은 대북정책의 상당한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4자회담에 나오면 식량을 지원할 수 있다는 연계정책을 기본축으로 삼았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를 뒤엎고 선 (先) 식량지원 카드를 꺼낸 것이어서 북한이 우리의 선의를 악용할 경우 국내에선 또한차례 거센 논란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한국은 단서를 달긴 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달성될 때까지 북한이 정전체제를 준수하고 남북 기본합의서를 실천하라' 는 요구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를 당장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우리 당국자가 이 단서에 대해 "최소한 기본합의서의 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가 본격화되고 군사정전위가 재가동되는 것을 뜻한다" 고 유연한 자세를 보인 배경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같은 정책전환을 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북한 식량난이 몰고올 한반도 위기지수 (指數) 를 낮추고 북한을 평화회담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식량카드' 외에는 묘책이 없다고 판단한 결과라는 것이다.

미국의 설득도 집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김정일 (金正日) 의 권력승계등 북한의 정치일정을 고려할 때 한.미 양국이 어차피 식량카드를 쓴다면 지금이 적기 (適期) 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내년에도 1백50만~2백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하다고 한다.

또 북한이 1차 예비회담에서 예비회담 의제가 아닌 주한미군 문제를 고집함으로써 예비회담이 더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이 본회담 참가조건으로 제시한 '식량 1백50만톤 지원' 요구를 계속 무시할 경우 본회담 개최는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과 미국의 급작스런 '밀월' 도 우리 정부의 정책전환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 됐다.

미국은 16일 뉴욕에서 열린 북-미 개별협상에서 북한의 동결자산을 해제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가겠다는등 적잖은 '선물' 을 약속했다.

북한도 미국의 이같은 '성의표시' 에 자신들이 지난달말 무기 연기한 미사일회담의 재개약속으로 화답했다.

우리 정부는 남북한간의 실질적인 대화와 북.미간 관계개선을 연계해 왔는데 그간 우리 입장을 수용하는 체하던 미국이 '본심' 을 드러내자 결국 본회담이 개최되면 북측에 제시할 예정이던 식량지원 계획의 대강을 미리 풀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한.미 양국의 정기적 대규모 식량지원 제의에 대해 4자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크다.

외교소식통들은 "한.미의 이번 제안으로 북한이 본회담 참가를 늦춰온 외견상 명분은 사라졌다" 며 "따라서 북한이 본회담 참가를 거부할 이유도 없다" 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앞두고 북.미 관계개선을 서두르는 북한의 처지등을 감안하더라도 본회담이 순항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정말 바라는 남북한 직접대화까지 북한이 수용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워싱턴 = 이재학 특파원.뉴욕 = 최상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