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 전란 중 남긴 대가들의 그윽한 묵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초순의 어느 날. 서정주·김동리·박목월·고희동·유희강·채동선 등 당대를 주름잡던 문화예술인이 대거 인천 나들이에 나섰다. 인천항 뒤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우문국(1919∼98) 화백의 결혼식 날이었다.

1950년 12월 인천의 한 결혼식에 참석했던 당대 최고의 문화계 인사들이 남긴 축하의 글과 그림. 왼쪽부터 고희동 화백의 그림, 김동리·서정주·조병화의 글.


피로연으로 이어진 자리에서 이들은 저마다 ‘끼’와 ‘멋’을 부려 축하의 글과 그림을 남겼다. 결혼수첩을 겸한 이 서화첩은 우 화백의 가족이 보관해 오다 60여 년 만인 5일 공개됐다.

40여 쪽 분량의 서화첩은 한지를 한 권으로 묶은 뒤 쪽마다 빨강·파랑·노랑의 색지가 덧붙어져 있다. 미당 서정주는 ‘그날 밤 山(산)은 시집와서 스무날쯤 되는 시악씨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적었다. ‘산’은 신랑 우 화백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시인 박목월은 멋들어진 흘림체로 ‘白沙場(백사장)에 임 왔다간 줄 누가 아리오’라고 쓰고는 ‘木月’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작가 김동리는 ‘中原有菽 野人採之(중원유숙 야인채지)’라는 힘찬 필체를 남겼다. ‘중원에 콩이 있네 들사람이 그것을 따네’로 풀이되는 글이다.

소설가 김송은 ‘하늘은 보얗다. 몬지가 날려서도 아니다. 구름이 흩어져서 보얀 것도 아니다. 다만 민족의 슬픔이 大氣(대기)에 서리어 있는 것이다. 그 하늘 밑에는 UN墓地(묘지)’라며 전란 속의 감상을 내비쳤다.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 등 3명은 묵화 한 폭씩을, 장인식 등 서예가들은 ‘百年松竹(백년송죽)’ 등의 글로 결혼을 축하했다. 글과 그림을 남긴 14명 외에도 방명록에는 조지훈·모윤숙 등 당대 문화예술인들의 서명이 남겨져 있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문학평론가)는 “과거 사대부들이 회합을 기려 공동 서화첩을 남기기도 했지만 근세 이후에는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했다. 초대 인천문화원장·인천박물관장 등을 지낸 우문국 화백은 생전에 18회의 개인전을 여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인천 예술계를 이끌었던 화가다.

인천=정기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