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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금융위기 탈출을 위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재정경제원은 지난달 25일 "국내금융기관이 해외에서 빌린 돈은 정부가 책임질 것" 이라고 발표했다.

신용공황 (恐慌) 이란 말은 들었어도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잇따른 대기업 부도로 국내금융기관의 대외신용이 추락해 궁지에 몰린 정부의 고육지책 (苦肉之策) 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작 이 발표의 대상인 외국인들은 별로 감동하지 않는 눈치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어서 감정에 호소하거나 추상적인 약속을 한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 (摘示) 를 원한다.

지금까지 발생한 대기업의 부도규모는 얼마며 그로 인한 은행.종금 (綜金) 등 국내금융기관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특히 국내금융기관의 총체적 부실은 얼마나 심각한가.

모름지기 문제 해결은 언제나 정확한 진단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납득할 만한 수단이 있는가 궁금해 한다.

해당기업이나 은행은 어느 정도 자산이나 담보를 확보하고 있으며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구제수단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민영화나 국유재산 처분, 세금인상등으로 충당하고 부족한 부분중 일부는 국채발행, 나머지는 해외에서 조달하겠다는 식의 구체적 방안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장기연체를 포함하면 국내은행의 총부실채권이 외화보유액의 2배를 초과하고 1년예산에 육박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것을 무슨 돈으로 해결할 것이냐고 묻는다.

가령 코리아 서밋에서 강경식 (姜慶植) 부총리가 제시한 '한국경제의 5대방향' 은 두루뭉실해 도무지 잡히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요컨대, 한국경제의 먼 장래는 접어두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이다.

사실 이러한 요구는 한국정부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첫째, 제시된 해결방안에 대해 외국인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면 외화부족은 쉽게 해결되고 원화에 대한 공격 우려도 불식될 것이다.

둘째, 외국인의 한국정부 인식이 한 차원 높아질 것이다.

즉 위기에 봉착해도 체계적 접근을 할 줄 아는 국가로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준비가 끝나면 '세일즈' 에 나서야 한다.

뉴욕.런던등 국제금융중심지에서 기관투자가들을 초청해 설명회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차원의 투자자관계 (IR) 로 한편으론 정부의 고위관리를, 다른 한편으론 국제금융서클에 잘 알려진 민간인사를 이용할 수 있다.

2년전 멕시코사태가 발생했을 때 재무장관 오르티스가 취임 1주일만에 뉴욕에서 기관투자가들을 모으고 대책을 설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참고가 될 만하다.

민간인사는 단순히 영어가 유창하다든지 전직장관이었다든지 하는 자격으로는 부족하고 현지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생활해 그들의 문화를 꿰뚫고 전문가로서의 명성과 식견을 가진 사람이 적격이다.

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공 (功) 을 독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평소 우호적인 외국인들을 만들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지난해 서울을 방문한 세계적 투자은행의 사장을 '어느 정도 높은' 관리가 만나야 하는지를 놓고 재경원이 고민한 적이 있다.

재경원의 수직적 사고로는 증권사 사장쯤이야 금융정책실장이나, 한 걸음 양보하더라도 차관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태도였고 그 회사측은 재경원장관과의 면담을 고집해 결국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은 회장이 된 그 사람은 뉴욕 월가 (街)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워싱턴 정가에도 친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진국클럽이라고 부르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도 가입한 이상 각 경제주체는 누구나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 진정한 세계인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정부가 모범을 보여야 할 터인데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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