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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경제’를 등졌고, 한나라는 ‘민심’을 등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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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가 나라 걸림돌” … 상임위 통과한 은행법 본회의서 좌절

“역사가 단죄할 거다.”

3일 자정 본회의장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다. 야당의 지연책과 한나라당의 나태로 2월 임시국회의 마지막 본회의는 허무하게 끝났다. 꼭 처리키로 약속했던 은행법안과 미디어 관련 법안이 결국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의장과 여야 원내대표 등 의회 최고지도자들의 합의가 휴지 조각이 된 것이다. 국회는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국가균형발전법도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다음 달 1일 시행을 전제로 편성한 관련 예산의 집행도 어려워졌다. 그래 놓고 일부 의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뒤풀이 술자리를 가졌다. 100년 만의 경제위기란 오늘, 대한민국에선 국회가 국가적 걸림돌이란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右)가 4일 새벽 국회 본회의가 폐회된 뒤 동료 의원들과 회의장을 빠져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장면1. “작전이 시작됐다.” 3일 오후 11시10분을 좀 넘은 시각 민주당 소속 유선호 법사위원장실에서 튀어나온 당 관계자의 말이다. 본회의장에선 같은 당 홍재형 의원이 나와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키로 한 여야 합의에 맞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을 주장하는 수정동의안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어 표결까지는 10여 분이 흘렀다.

#장면2. 오후 9시에야 열린 본회의는 같은 당 이석현 의원의 5분 발언으로 시작됐다. 김형오 국회의장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진 그의 발언은 10분 넘게 이어졌다.

2월 임시국회의 마지막 본회의 3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민주당은 전날 미디어법 등을 6월 국회에서 처리키로 하고 나머지 경제·비쟁점 법안을 이날 처리키로 한나라당과 합의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민주당이 지연작전을 폈기 때문이다. 두 차례 연기된 끝에 열기로 한 본회의 시간은 7시였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9시를 넘겨 하나둘씩 회의장에 나타났다. 민주당 의원들이 추진해 온 제주특별자치도법을 제외하고는 표결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정세균 대표는 현장에서 “(정무위에서) 은행법 합의가 되기 전까지는 표결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며 의원들을 지휘했다.

유선호 위원장은 ‘태업’을 벌였다. 정무위에서 한나라당이 단독 의결한 은행법 개정안을 법사위로 보냈지만 유 위원장은 끝내 상정하지 않았다. “여야가 합의한 법안만 처리한다는 게 법사위의 관행”이라는 이유를 댔다. 한나라당에 재협상을 하든지, 직권상정을 하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이었다. 민주당은 은행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하면 몸으로 막겠다는 전략도 미리 세웠다.

 자정 무렵 은행법 처리가 좌절되자 민주당 의원들은 미소 지었다. 원 원내대표는 본회의 종료 전 회의장 밖에서 마주친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우리가 뭐가 되게는 잘 못해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 잘 못되게 할 수 있다는 걸 봤느냐”고 했다. 스스로 합의문까지 써가며 약속했던 사안을 뒤집고 말을 바꾼 데 대한 반성은 없었다.

◆사정정국 오나=임시국회가 끝난 3일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이광재 의원을 약식기소했다. 법무부는 “국회 폭력 사태에 엄정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자 의원들 사이에선 “사정정국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송영길 최고위원은 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이 수사 시기·대상을 정치적으로 조절하고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세균 대표도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여당과 야당에 들이대는 잣대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임장혁·백일현 기자

한나라

“참 무능한 공룡정당.”

한나라당 의원들이 3일 밤 임시국회 본회의가 정족수 미달로 개회되지못하자 동료 의원들에게 전화로 참석을 독려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3일 은행법 개정안 등 쟁점 법안 처리가 무산된 직후 본회의장을 나오던 한나라당 재선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의 의사 진행 방해(필리버스터)를 속수무책 지켜보기만 한 당 지도부와 국회의장단을 향한 냉소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자고 나면 바뀌는 민주당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라며 홍준표 원내대표에게 울분을 토했다.

171석 거대 여당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겉으로는 ‘3·2 합의’ 파기 책임을 민주당의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가 크지만 내부적 자성론도 만만찮다.

비판의 핵심은 ▶집권당으로서의 책임감 부족 ▶취약한 리더십 ▶원내전략 부재 등이다. 요약하면 “83석 민주당에 대적하기엔 당의 체질이 너무 ‘연골’이다”는 얘기다.

3일 본회의는 책임감과 리더십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오후 7시에 예정된 본회의가 정족수 미달로 2시간여 지연됐다. 4일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송광호(제천-단양) 최고위원은 “(어제) 원내대표에게 몇 명 왔느냐고 물었더니 104명이라 하더라”며 “이래선 야당을 이길 수 없는 것 아니냐. 상대만 지탄할 게 아니라 우리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초선들의 실망감이 컸다. 조전혁(인천 남동을)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 원내지도부는 아무 지시를 내놓지 않더라”며 “만일 본회의 직후 의원총회가 길어졌더라면 지도부 성토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해진(밀양-창녕) 의원도 “본회의 법안 처리 실패 사건은 원내지도부와 국회의장단의 무능·무책을 웅변한 표본”이라며 “마치 경기 종료 5분 전 자살골로 마감하는 축구 시합을 보는 듯했다”고 성토했다.

결국 웰빙 정당이라고 불려온 한나라당의 ‘체질’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신지호(서울 도봉갑) 의원은 “지금까지 독하지 못했던 당의 체질이 매섭고 집중하며 단결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참 소득 없는 국회”=여야가 합의했던 은행법의 처리까지 무산되자 청와대의 불만은 끓어올랐다. 이날 오전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여당의 무기력함과 야당의 발목 잡기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MB 개혁법안’을 챙겨 온 한 핵심 참모는 “참 소득 없는 국회였다”며 “청와대와 정부 부처들은 2월 국회에서의 법안 처리와 신속한 후속 작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정치권은 너무 안일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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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남궁욱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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