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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 3040 기대주 ⑤ 설치미술가 박윤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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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30년간 69명의 여자를 살해해 돼지 사료로 쓴 캐나다 밴쿠버의 농장주 로버트 픽톤 사건,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사건, 엑손 발데스호 기름유출사고….

박윤영(41)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다. 상상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술계에서도 그의 상상력은 돋보인다. 거침없는 주제의 작품을 보다가 가냘픈 외모, 조심스러운 말투의 그를 직접 대하면 그 의외성에 놀라게 된다. 박윤영의 작품은 그림으로 이뤄진 한 편의 추리소설이다. 영화·오페라·발레·소설·노래·살인사건 등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취하고 뒤섞어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대표작 ‘픽톤의 호수’(2005)는 캐나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기본틀로 삼고, 여자들이 사라진다는 모티브에 착안해 발레 ‘백조의 호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트윈 픽스’를 연결지었다. 여기에 간간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헤밍웨이의 소설까지 접속시킨다. 작가는 스스로 탐정이 돼, 사라진 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표면과 달리 학대·희생·트라우마 등이 깔린 끔찍한 이면을 발견한다. 이어지는 작품 ‘아겔다마로의 여정’과 ‘익슬란 스톱’에서 이 같은 표현법은 좀 더 복잡해진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독창적 표현법이다. 여기저기서 소재를 엮듯,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작가는 재구성한 이야기를 글로 쓴 후, 중요하고 흥미로운 내용들을 병풍·족자·영상·신문스크랩 등에 나눠 담음으로써 일종의 종합 설치 작업을 만들었다. 이질적인 것들을 엮은 작업의 특성과 맞아떨어진다. 동양화과 출신이고, 병풍과 족자를 주로 사용하지만 그를 동양화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아겔다마로의 여정’(2006)은 핏빛 병풍의 산수화 앞에 전자 기타를 놓은 설치 작품이다. 아겔다마로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자살한 곳이다. [박윤영 제공]


그렇다고 박윤영을 머리만 큰 작가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작업실에서는 물감·붓·종이 등 일반적인 미술재료보다 신문·카메라·자료사진·소설·음반 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실제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살인현장과 법정을 직접 찾아다녔다. 생생한 작품을 위해 전자기타를 배우거나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다가가기 위해선 상당한 사전지식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숨겨놓은 여러 힌트를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작업의 주인공은 바로 관람객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루는 소재는 모두 우리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윤영은=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본인의 작품을 “다큐멘터리·추리소설·희곡·초현실주의와 관객이 풀어가야 하는 퀴즈게임 등이 어우러진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전으로 ‘익슬란 스톱’ ‘픽톤의 호수’, 그룹전으로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트스펙트럼2006’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광주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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