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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마저 달콤한 벨기에 Royal Golf Club of Belgium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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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에서 우린 볼거리 보다는 먹거리에 충실했다.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인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 광장은 화려하고 예쁘긴 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았다. 사방이 중세의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한 쪽 전경을 한 장의 프레임에 담기 위해 뒷걸음질 치다 보면 어느새 반대편 건물에 막혀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광장 초콜릿 가게에서 먹은 핫초코의 맛은 일품이었다. 또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라 자랑하는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은 어느 건물 귀퉁이에 붙어있는 50cm의 보잘 것 없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그 거리의 와플은 입에서 녹았다.

흔히들 식도락의 나라라고 하면 프랑스를 떠올리지만 음식에 관한 한 벨기에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3,000 가지가 넘는 벨기에 맥주는 독일 맥주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맥주를 와인만큼 신성하게 다룬다고. 하여 유럽에서는 벨기에 맥주를 독일 맥주보다 더 인정하는 분위기란다. 오래 전부터 세계 최고라 인정 받아온 초콜릿, 홍합을 와인이나 크림 등의 재료로 요리한 뮬(Moules)이라는 이름의 요리. 뿐 만 아니다. 감자를 손가락 굵기로 썰어 튀긴 프렌치 프라이가 알고 보니 벨기에가 원조였고, 길거리 간식으로 대중화된 와플이 또한 벨기에 출신이었다.

영국에서 다운 그레이드 되었던 우리의 우울한 미각이 프랑스에서 재가동을 시작하더니 벨기에에서 클라이막스에 도달했다. 더불어 우리의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는 가파른 2차 방정식 그래프를 그리며 상승하고 있었다.

상승한 콜레스테롤은 골프장에서 제대로 떨어뜨렸다. 그랑플라스에서 동쪽으로 불과 10여분 거리 Tervuren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Royal Golf Club of Belgium(R. G. C. B.)은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로열 골프장이었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왕이 건재하는 국가에서의 ‘Royal’은 우리처럼 브랜드 네임으로 채택하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친히 왕에게 ‘Royal’의 명예로운 칭호를 하사 받은 R. G. C. B.는 벨기에에서 첫째 둘째 손가락에 꼽히는 골프장이다.

골프장은 정확히 왕실의 삼림공원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진입로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단정하게 정돈된 나무를 통해 왕가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R.G.C.B.는 리오폴드 2세(Leopold II)가 국민들에게 준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1906년 왕실의 땅에 골프장을 건설을 명하고, 왕 소유의 라벤스테인 성을 클럽하우스로 용도 변경했다고.

그 덕에 클럽하우스 부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왕가의 깊숙한 정원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클럽하우스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궁전의 모습을 많이 닮아있었다. 건물의 모양하며 각지게 다듬어놓은 정원수들하며 심지어 코스를 관리하는 작업복 차림의 직원들이 궁전 하인들처럼 느껴졌으니….

이름을 모르는 독특한 모양의 침엽수들이 빼곡한 숲은 왕가의 삼림공원 가운데에 자리잡은 파72 6,041m의 Old 코스 레이아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진 레이아웃을 갖추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파크랜드형의 코스지만 페어웨이는 약간의 언듈레이션이 느껴졌고, 그린은 까다로운 편이었다.

Old 코스 원 설계자에 대해서는 문헌으로 남겨진 바가 없지만 아일랜드의 Royal County Down을 설계한 Seymour Dunn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Tom Simpson이 1928년 리모델을 했다고 하니 뼈대 있는 거장들의 손만 거친 셈이다. 하지만 1990년부터 10년간의 긴 리모델링 프로그램을 진행시킨 탓인지 원작자의 숨결보다는 현대적 감각이 많이 반영된 느낌이었다. 18홀 정규홀인 Old 코스 외에도 9홀 New 코스가 1951년부터 운영중이라 기술력 배양을 희망하는 골퍼들에게 연습홀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삼림공원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덕에 골프장 전체가 빽빽하게 나무들로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그 숲에서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 오줌싸개 어른의 모습도 보였다. 벨기에답게도… ㅋㅋ. 특히 조경수를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독특한 침엽수들이 많았다. 이는 식물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리오폴드 2세가 심혈을 기울여 직접 선택한 수종들이라고.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싱싱한 피톤치드를 폐부 깊숙이 흡입하니 공기에서도 단맛이 느껴졌다. 벨기에… 음식만 맛있는 줄 알았더니 공기마저 맛있는 진정한 식도락국이었다. 양질의 산소를 들이키며 확실한 유산소 운동을 마친 우린 클럽하우스에서 뮬(Moules)을 안주 삼아 스텔라 맥주를 들이키며 다시 한 번 더 탄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진정한 식도락국은 한국이 아닌가 싶다. 추운 겨울 퇴근 길에 뜨거운 홍합탕 놓고 마시는 소주 한 잔이 더 진국이라는 의견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