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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북적이는 거리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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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봄이 무르익으면서 일터가 있는 서울 서소문에서 광화문이나 종로까지 갈 일이 생기면 차를 타기보다는 걷고 싶어진다. 지하도를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하던 시절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시청 앞 잔디광장 옆을 지날 때면 길 위로 광화문까지 갈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흐뭇하기까지 하다. 새로 생긴 횡단보도와 보행로 정비 등의 성과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려면 한참 멀었다는 느낌이다. 길과 건물이 여전히 자동차 중심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길은 자동차 소통이 잘되고, 건물은 차량 출입이 편한 게 최우선이다. 걸어다니는 사람에게는 길과 건물의 모습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건물 1층의 형태와 재료, 길에 대한 개방감 등 눈높이에서의 상호작용이 세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 대로변의 많은 건물은 길을 향해 등을 돌린 모습이다. 이런 현상은 오래된 건물들보다 새로 지은 대형 건물들에서 더 두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종로 1가와 2가는 좋은 비교거리다.

종로 1가의 남쪽은 재개발이 끝나 대형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곳은 건물로 드나드는 차량들이 보행의 흐름을 끊고, 건물 1층에는 대형 로비가 배치돼 내부 지향적인 형태다. 또 건물 주변에는 관상목을 심거나 접근이 어려운 조각품을 배치해 건물을 더욱 배타적이고 길과 유리된 장소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보신각을 지나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는 종로 2가에 이르면 거리가 활기를 띤다. 찻집과 빵집, 옷가게 등 각종 소매점이 길과 바로 붙어 열린 형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밤이 되면 가게들의 불빛과 조명시설, 드나드는 손님들로 인해 보행자들은 불 꺼진 대형 건물 앞을 지날 때보다 편안한 기분이 든다. 재개발 지역이 자동차 위주인데 비해 옛날 모습을 간직한 동네가 보행자에게 친화적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보행자가 많은 거리일수록 안전하다. 미국의 도시계획가 오스카 뉴먼은 "도시 공간을 안전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은 공공의 눈(public eye)"이라고 지적했다. 즉 보는 눈이 많을수록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보행자 위주의 거리는 그곳에 면한 건물의 상업적인 성과를 높이는데도 큰 효과를 나타낸다.

1980년대 초 미국 보스턴 도심의 워싱턴 거리에 면한 소규모 가게들은 길 한 모퉁이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손님을 잃기 시작했다. 이에 가게 주인들이 힘을 합해 자동차 통행을 제한하고, 보도를 넓히고, 가로수와 꽃을 심고, 벤치와 밝은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가게 앞 도로를 보행자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사람이 모여들면서 상권이 되살아났다.

경기도 일산의 라페스타 거리는 비슷한 국내 사례다. 고양시와 한 기업이 300m 정도의 황량하던 보행로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보행로에 면한 건물의 전면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만들고, 곳곳에 볼거리 이벤트를 여는 등 축제 거리 분위기를 만들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서울시는 시청광장에 이어 남대문 앞 광장 조성과 가로 환경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올 가을이면 청계천 복원도 완료될 예정이다. 이 길들을 정말 걷고 싶게 만들려면 보도 블록을 새로 깔고 가로수를 심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건물의 형태 및 건물과 길의 관계에 이르는 세심한 도시.건축설계에 대한 고려가 담겨야 한다. 가로변 건물에 적절한 기능을 유치하는 산업정책도 곁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보행자가 주인공인 거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신혜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