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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능지기 고영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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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올해로 90주년을 맞은 3·1 운동의 기폭제는 고종 황제의 장례였다.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을 앞두고 수십만 군중이 상경해 있던 참에 33인 대표들이 거사 날짜를 고른 것이다. 당시 조선 민중에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시고 침소에 든 뒤 급서했고, 그날 밤 숙직을 한 사람이 친일파 이완용과 이지용이었다니 그런 소문이 나돌 법도 했다. 성난 군중은 고종의 유해가 안치돼 있던 덕수궁 앞에서 목놓아 만세를 불렀다.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에 가면 ‘대한고종대황제홍릉(大韓高宗大皇帝洪陵)’이라 새긴 비석을 볼 수 있다. 잘 단장된 비각 속에서 늠름하게 능을 지키고 있는 이 비석이 세워진 건 오롯이 능참봉 고영근의 덕택이다. 고영근은 원래 장단 군수와 경상좌도 병마절제사를 지낸 벼슬아치였다. 1903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방조범 우범선을 일본 히로시마까지 찾아가 목에 비수를 꽂고 살해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 자수하며 ‘원수와 같은 하늘에 살 수 없어 9년 만에 백성의 통절지한을 풀었다’고 쓴 글을 제출했다.

옥고를 치른 뒤 귀국한 고영근은 고종이 승하하자 홍릉 능참봉을 자원했다. 그에겐 숙제가 있었다. 만들어 놓고도 세우지 못한 능비(陵碑)에 제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었다. 일제는 ‘대한’이란 국호와 ‘황제’란 칭호를 새긴 것을 트집잡아 비석을 못 세우게 했다. 일제가 고종에게 부여한 칭호인 ‘이태왕(李太王)’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년간 홍릉을 지키던 고영근은 어느 날 목욕재계한 뒤 거적에 싸인 채 방치돼 있던 비석을 세웠다. 그러고는 곧장 순종의 거처인 창덕궁으로 달려가 “이제서야 선왕의 홍은(鴻恩)에 보답했다”며 석고대죄했다. 참봉직에서 파면된 그는 홍릉 옆에 초막을 짓고 살다 근처에 묻혔다.

엊그제 3·1절 기념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발언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대 3·1절 행사에서 볼 수 없던 일이다.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구축하자는 이 대통령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란 해석이 뒤따랐다. 두 나라의 교류·협력과 미래 지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잊는 건 곤란하다. 일본의 과거 악행을 두고두고 원망만 하고 있자는 게 아니라 뼈아픈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이따금 과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모두 잊고 지내는 능지기 고영근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본 건 그런 의미에서다. 망국의 군주를 위해 비석 하나 제대로 세울 수 없었던 그 아픔까지 잊어선 안 되겠기에.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